2023. 6. 12 / 국립중앙박물관
영국을 제국주의로 만든
산업혁명과 증기선의 출현을 언급하며
증기 기차와 증기선을 주제로 그린
터너를 얘기한다.
영국인에게 터너는
영국 국민 화가라는 이미지로
제격이 아닐 수 없다.
산업혁명을 일으킨 자금 조달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풍족했고 중심이었던
인도 무굴제국을 갈취해서라는 말은 없다.
영국 내셔널갤러리는
터너가 프랑스의 클로드 로랭에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터너도 솔직하기도 하지,
클로드 로랭 그림과 같이 그림을 걸어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이번 전시에도
로랭과 터너의 그림이 같이 나란히 걸려 있다.
구도와 스케일이 유사하다.
어떻게 터너의 추상과도 같은 풍경화가
돌연히 나온 것일까?
추상성은 런던이 안개의 도시라서 그렇다 치자.
터너 작품의 구도와 스케일은
로랭과 카날레또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모네는 구도에 있어서는 터너,
컬러에 있어서는 카날레또와
앞으로 얘기하게 될
일본화의 영향이 지대하다 하겠다.
인상주의 그림의 컬러가 화려하게 된 동기는
의외로 재미나다.
그 당시는 청화백자가 요즈 핸드폰 교역처럼
주요 무역 품목으로 성행하던 시기이다.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들은
유럽으로 수출이 많았다.
운송에 있어서 도자기들이 깨지지 않도록
도자기 주위에 종이를 구겨 넣어야 했는데
유럽에서 도자기 포장을 해체하다 보니
그 종이들이 같이 나왔다.
그 종이들은 일본 판화 찍다 버린 종이들이었다.
유럽에서는 처음 접하는
화려한 색채의 판화들이었다.
그것들을 잘 펴서 판매하게 되었고
유럽 사람들과 예술가들은 일본 판화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칙칙한 그림을 그려왔던 유럽에서는
화려한 원색의 일본 판화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게다가 파리에서 있은 만국박람회에서의
일본 그림들이 인기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파리에서 멀지 않은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에 가 보면
벽에 온통 수집한 일본 그림들이다.
오죽하면 정원과 정원의 다리를
일본풍으로 만들어 그림을 그렸을까.
고흐의 작품 중에도 일본 그림을 그대로
한자까지 모사한 작품을 몇 점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모네의 수련 연작, 긴 대작 그림들은
콩코르드 광장의 오랑주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내륙의 오스트리아 빈의
클림트와 에곤 쉴레 역시
일본 그림의 영향을 많이도 받았다.
그 시기부터 그렇게 색채는
팽창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형태의 사실성은
명확한 윤곽선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초기 인상주의 삼인방인
모네와 시슬레 그리고 피사로는
보불전쟁 기간 동안 징집을 피해
런던으로 도피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런던에서 터너의 영향을 받는다.
전쟁 후 파리로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인상주의의 선두주자가 어느새 되어갔다.
모네는 마네와도 친했지만
르누아르와는 화실 동기였다.
같이 야외에서 같은 장소를 그린 그림들이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있기에
비교해 보기 좋은 예이다.
Claude Monet, La Grenouillere, 1869
Pierre-Auguste Renoir, La Grenouillere, 1869
Claude Monet, La Mare aux canards
Pierre-Auguste Renoir, La Mare aux canards
Claude Monet, Régates à Argenteuil
Pierre-Auguste Renoir, Régates à Argenteuil
모네가 인상주의의 대표주자이고
프랑스 고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색채를 구사한 것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이 그림들을 비교를 통해 보면
실력차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작품의 품질이나 감성적으로 보면
르누아르가 한 수 위다.
색감에서도 모네가 르누아르에 비해
표피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르누아르는 영국에 가서
터너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형태의 선이 모네보다 더 없어진다.
다빈치가 개발한 수푸마토 기법보다
더 전체적으로 형태 외곽선이 모호하다.
그리고 수푸마토 기법은
여러 차례 덧칠을 통해서
은은하게 외곽선을 없앴다면
르누아르는 한 번에 그것을 해결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모네가 인상주의의 시작이고
성공하기는 했으나
르누아르의 작품이 더 개성적이고
독보적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르누아르 풍의 그림을
모방하는 작가를 보지도 못했다.
시간이 가면서 더 밝혀지리라 기대해 본다.
모네는 잘 그리려 노력해서 이룩한 성과라면
르누아르는 타고났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 르누아르 그림은
실물을 보니 이번 전시 그림 중에
가장 작은 그림이다.
뒷모습을 그려 얼굴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작은 몸의 탄력 있는 단단한 볼륨감은
일품이다.
모네의 당대의 영향력은 가히 대단했다.
그만큼 인기도 높았으며
당대 최고로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추종자 또한 많아서 지베르니 모네 집
근처에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미국 작가들도 있었다.
미국 작가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가는
사전트이다.
사전트가 프랑스에 머물면서
당대 사교계의 꽃이었던
마담 X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고
센세이션과 스켄달을 일으킨다.
심플하고 고혹하고 시크하기로
마담 X만 한 그림이 없을 정도이다.
1884년 파리의 살롱에 출품한
'마담 X'라는 초상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는
섬세하고도 에로틱한 상류사회 한 부인의 초상화로
전시회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귀부인은 파리 사교계에 등장한 미국 여성이었다.
사람들은 검은 옷과 마치 시체와 같은 하얀 피부,
흘러내린 어깨 끈.
그림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비판에
사전트가 훗날 덧칠해서
어깨 끈의 위치를 수정했다고 한다.
에로틱이 혼용된 그림에서 죽음과 퇴폐를 읽었다.
데보라 데이비스는 이 그림을 모티브로
〈흘러내린 끈〉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그림의 모델인 아멜리가
1880년대 프랑스의 정치적 실세였던 레옹 강베타,
수에즈 운하를 계획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로 명성을 날린
사무엘 장 포지와 연인 관계였다고 밝혔다.
특히 산부인과 의사였던 포지는
유명한 바람둥이였으며
또 포지의 초상화 역시 사전트가 그려줬다.
"마담 X"는 숱한 스캔들을 만들어,
사전트는 어쩔 수 없이
파리에서 런던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그는 생을 마감한다.
사전트, 마담 X
존 싱어 사전트, 우산과 여인
이렇게 전시 기획의 변을 거창하게
마무리하는 전시는 드문 일이다.
영국 제국의 국뽕적 느낌이 팍 난다.
심지어 섹션으로 나눠진 전시홀 중간 복도엔
워즈워스의 시 판넬까지 있었다.
영국 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