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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건축과 미술 13
백제 금동대향로

by 이승희



한국의 건축과 미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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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 감각의 예술혼이 빚은

백제 금동대향로



대륙의 선산, 한반도


대륙 입장의 시각에서 볼 때

조상의 무덤을 쓸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안전하고 수려한 장소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적합했으리라.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나 비파형 동검 출토지

분포만 보더라도 동쪽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고

삼국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구리는 평양 인근과 집안에,

신라는 경주에,

가락국은 김해에 고분군들이 많다.

백제의 왕가의 선산으로는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능산리가

발굴에 의해 밝혀졌다.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사항은

무덤이 많은 곳이 옛 수도일 거라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역사 조작의 결과이다.

대표적인 예로

고구려 집안이 고구리의 수도였다는 설이다.

집안은 강을 끼고 있지만

산이 험한 오지이다.

도시가 형성될 수 없는 곳이다.

아무런 도시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백제도 마찬가지다.

백제의 수도는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웅진과 사비라는 지명은 한반도에는 없다.

대륙에는 있다.

수도였다면 왕궁터의 흔적인

주춧돌이 있어야 되는데

공주와 부여 어디에도 없다.

공주나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다는 근거는 없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역사 날조에 불과하다 하겠다.


삼국시대 국가들이 대륙에 있었지만

무덤군들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금동대향로 출현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부여읍 능산리에서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다.

이후 조사 결과

해당 향로가 발견된 주차장 공사 현장이

백제 시대 왕실의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밝혀졌다.


왕가의 무덤 근처에는

절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들이기에

선조를 기리고 제사와 능 관리를 위한

사찰이 있다.


그 발견으로 사찰터를 조사한 결과,

석조 사리감이 발굴되었다.

그 사리감에는

"창왕(위덕왕) 13년(567년)에

정해공주가 이 절을 지었다"라고 쓰여 있다.

위덕왕의 누이가

아버지인 성왕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건립한 것이고

금동대향로는 성왕을 모시기 위한

사찰 용품이었던 것이다.





금동대향로 구조


금동대향로의 외부 디자인 구조는

크게 하부 받침 부위와 상부 향로로 되어 있고

상부 향로는 향을 태우는 그릇 부분과

뚜껑으로 나뉜다.


하부 받침은 용으로 되어 있다.

용의 벌린 주둥이가

향로를 떠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보아,

둥근 향로가 여의주로 여겨진다.

여의주 치고는 용보다 크다는 점과

위가 뾰족한 형태라는 점이

기존 우리 생각과는 다르지만,

내부 에너지의 속성은 유동적인 바,

끝이 뾰족한 것이

둥근 것이 형성되기 전이나 후의

형상일 것이다.

용이 며느리 발톱을

허공에 위로 세우고 있는 모습에서

얼마나 용트림을 하고 있는지가 표현되어 있다.


상부 향로 그릇 부분 외부는

연꽃잎이 피는 모습이고

뚜껑 디자인은 겹겹이 산들 사이에

각종 동물과 다양한 풍속이 들어가 있어

입체적인 화려함을 가중시킨다.

뚜껑 꼭지는 위엄 있는 장닭을 위치시켜

이 금동향로의 꼭짓점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금동대향로의 컨셉 사상


전체적인 컨셉은

음양오행사상과 신선도와 불교가

각각 부위를 차지하며 의도되어 제작되었다.

꼭지의 봉황대신 장닭과 하부의 용은

음양을 상징하고

뚜껑 산 위에 위치한 오인의 악사와

정상과 네 겹의 산맥을 합해 5가 되는 것은

오행을 상징한다 하겠다.


뚜껑에 조각된 자유로운 생물들로

신선도의 이상 세계가 구현했다.


그릇의 외부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음양오행 사상은

동이족의 뿌리 깊은 사상으로

그 안에는

고조선의 3수를 신봉하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음양을 그 중심과 합하면 셋이 되므로.


오행은 음양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중앙과 함께 운용되는 되는 것을 의미한다.











금동대향로의 박산이 시사하는 바


백제가 대륙에 있고

백제 왕가의 선산이 한반도에 있는 관계로

금동대향로는 대륙 백제에서

만들어졌을 확률이 많다.

대륙에는 금동대향로와 유사한 향로가

더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의 비교 사진은

1993년 부여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동대향로(우측)와

중국 섬서성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더분한 박산 향로(좌측)이다.


일단 척 봐서,

맨 꼭대기 장닭의 실루엣이 사뭇 틀리다.

향로를 받치고 있는 하부의 인물과 용의

수준 차이는 실로 크다.

절대적인 예술 감각을 가진 명인과

일반인 보다도 못한 수준인 장인의 차이?


중국 섬서성의 향로의 이름은

박산 향로라 한다.

향로 뚜껑에 겹겹이 표현한 산이

박산이라는 것이다.

박산을 한자로 쓰면 博山이다.

산동성 태산은

오래전에는 대산岱山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가장 오랜 이름은 박산이다.


여기서 '박'은 중국어가 아니라

순수 우리말로서 밝은 산이라는 의미의 밝산이

한문을 차용해 기록하다 보니

박산(博山)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진시황과 한무제도

태산(밝산)에 제사를 지내려 왔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에게도 태산은 신성한 산이었다.


박산인 태산은

원나라 몽골의 침입 전까지는

고래로부터 동이족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위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백제 금동대향로의 뚜껑에 묘사된 산은

박산(태산)임이 증명되었고

백제 금동대향로가

대륙 백제에서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배소(팬플룻)


백제 금동대향로에는 오행을

박산 위 정상부에 다섯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배치함으로써

표현했다.

그 악기들은

거문고, 완함, 종적, 배소, 북이다.

즉, 현악기 2, 관악기 2, 타악기 1로

구성되어 있다.

고음에서 저음으로 나열하자면

종적 > 완함 > 배소 > 거문고 > 북

순이 되겠다.


종적은 세로로 부는 피리이고

피리는 또 다른 우리말로

젓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젓대는 젓가락과 같이 기다란 것을

명칭 하는 말이다.

ㅈ이 들어간 것들은 대부분 기다란 것에

이름을 붙였다.

모음 ㅏ와 같이 쓰면 자가 되어

잣대란 말이 형성되고

ㅣ와 결합해서 가지나 오이지와 같이

길쭉한 것의 명칭을 만들었다.



오늘날 팬플룻이라는 악기는 5세기 때 등장한 안데스 악기 '삼포나(Zampoña)'[1]에서 기원한 '남미형 팬플룻',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루마니아에서 정립된 '나이(Nai)'를 기원으로 한 '유럽형 팬플룻' 두 가지를 일컫는다.



고전 그리스어로는 '시링크스(σύριγξ)'라고도 하며, 명칭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목축의 신 '(Pan)'에서 비롯됐다. 이외에도 중국과 국악기에서 쓰이는 소(簫), 태국의 웟(Wot), 조지아의 라체미(ლარჭემი) 등 길이, 즉 음높이가 다른 여러 대의 관을 모아 만든 악기는 전세계에 존재했다.


그리고 팬플룻이 남미에 전해진 것은

언제인지는 모른다.

다만, 베링해를 거쳐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주가 시작된 것은

세계 인류 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20,000년부터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고구리의 맥이족이

멕시코로 유입된 것은

고구리가 망한 668년 이후

820년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악기는 배소이다.

그 역사가 추정컨대 길기 때문이다.

배소는 팬플룻이다.

금동대향로를 저술한 저자에 의하면

배소는

인도에서 유래되어 초원의 길의 중심에 있는

쿠차를 통해 고구려로 전해졌다고 본다 한다.

그러나 그건 불교 문화의 경로이고

전쟁으로 민족 이동 경로로 보건대

인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동양 문화가

기후나 전쟁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

남쪽인 인도나 현 동구 유럽권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역사 정황으로 보아 맞다고 본다.




파미르 고원에서 시작한 인류가

지대가 낮은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고

여러 상황으로 이동하면서

서북쪽으로는 인도유럽 아리안 문화가 되었고

동북쪽으로 이동해서는 환국과 같은

이족(동이족)의 아리랑 문화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시대는 환인의 환국과 환웅의 배달국

그리고 단군의 고조선 시대이다.

환웅시대는

인류 4대 문명보다 앞선 홍산문화를 형성한다.

고조선 시대까지는 연방제로

여러 국가들이 제후국으로 있는 국가 형태였다.


환인 12국 시대 중 하나였던

월지국이 있었으며 월지국은

옥무역을 주로 담당했던 국가였다.

환웅 시대에는 그 시대 연방국 가운데 하나인

색국(스키타이)이 금무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색족(스키타이)은 이동 무역민족으로

동양의 환국 근거지 근처인 알타이 일대에 있으면서

그리고 실크로드 상 월지국 옆에

오손국과도 같이 있었던

상당히 광범위하고 활동적인 족속이었다.



초원의 길을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쪽으로 가다보면 도착하는 곳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카프카스산맥 북쪽 일대이다.

그곳은 서쪽에서 이동하는 민족이 늘

더 서쪽인 동유럽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거점)로 삼았던 곳이다.


색족(스키타이)은

기원전 1,200년 전부터

카푸카스 지역을 통해 지금의 우크라이나에도 정착한다.




색국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히스토리라는 서양 최초의 역사서에 의하면

스키타이라 불리며 자세히 나온다.

스키타이국은

그리스 북쪽 지금의 루마니아 위 우크라이나에 있어서

흑해를 통해 그리스와 활발한 무역을 하는 관계였다.

실지로 그리스는 폴리스 국가로 흑해 연안 여러 곳에

폴리스를 두고 있었다.



색족(스키타이)은

한때 월지에게 눌려 살던 흉노족이 강성해지자

월지와 오손과 는 밀려 서남부로 이동하게 되고


스키타이의 이동으로

남쪽으로는 인도로 가서 색족으로 불리고



또한 동이족이

16세기 전까지는 붙어 있었다고 하는

베링해협과

베링해 남쪽 알류산 열도를 통해

알래스카의 경로로 이동해서

아메리카로 이동했고 남미까지 갔다고 본다.


그 증거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멕시코에도 남아 있지만

남미까지 간 대표적 증거가

팬플룻이지 싶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대

피레네 산맥 끝자락 대서양 해안에

유명한 ‘바스크’족(Basques)이 살고 있다.

바스크족 언어는

주위 유럽의 인도·유럽어족과 전혀 달리

고대 한국어와 문법이 같은 우랄어족이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일파가 전쟁으로

서쪽으로도 이동했는데

가장 멀리 이동한 경우 중 하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많이 알려진

빌바오의 바스크족도

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조선 문명을 이해하면

이러한 문제가 바로 풀린다.

“구려(홀본 부여)=우구르=유(柔·兪)=유연

=아바르(Avars)”가 동일 민족이고

아바르족이 정착한 나라가 바스크이다.









아바르족은 유연 제국이 몰락한 직후인

AD 6세기경 동유럽에 등장한 유목 민족이다.

18세기의 동양학자 조셉 드 기뉴는

유연과 아바르족 사이에 연관성을 주장했다.


현대의 유전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바르인과 유연이 연관이 있다는 가설은

매우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한다.




루마니아 역사에는

3세기 이후부터

로마 제국이 계속 쇠퇴하면서

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땅을

포기하게 됨에 따라,

고트족이나 훈족, 게르만족,

아바르족, 스라브족, 마자르족,

불가르족, 페체네그족, 쿠민족 등

여러 민족들이 훑고 지나갔다.

이들은 차례대로

현재의 루마니아에 정착했다.




부여족이 세운 나라 불가리아


부여는

346년 선비족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타격을 받는다.

중심 세력을 잃은 부여족의 한 갈래

4세기 말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북카푸카스 일대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서양에서는

부여족은 불가르족으로 기록된다.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카프카스 북쪽에 당도한다.

그곳에는 먼저 이동해 온 후연의 세력

아바르족이 있었다.


635년 불가르족의 족장 쿠브라트는

아바르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불가르족을 연합을 결성해

'마그나 불가리아'

(대 불가리아, Magna Bulgaria)를 건국한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에 쿠브라트 칸은 죽고

이후 튀르크계 유목민족 하자르의 침입으로

붕괴되고, 그의 아들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진다.

그중 세 아들이 이끈 불가족은

다른 족에게 복속되고 말았지만,

둘째와 세째 아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가 세운 고추불가국은

14세기까지 번창하였고

현재는 타타르 자치국으로 존재한다.


세째 아들 아스파루흐는

678년 다뉴브강을 건너 발칸반도에 도착하였으며

681년에 3~5만 명의 군사로

비잔틴 로마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발칸반도에서 불가리아을 건국했다.

불가리아라는 이름은

'불가르족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부여족은 귀족 신분이 되어 보야라고 불렸으며

스라브족을 백성으로 다스렸다.


부여족의 한 갈래 > 불가르 > 불가리아


그들이 밝안산이라 이름 지은 산 아래에서

단군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밝안산은 발칸산이 되고

지금의 발칸반도의 이름이 된다.


5세기 흑해 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기원으로 하고 있는 불가리아는

부여가 세운 나라였다.




그래서 불가리아는 유럽국가 중

동양계 모습이 얼굴에 많이 섞여 있으며

유별나게 한국과 친연성이 높으며

언어와 문법 구조도 한국어와 비슷하고

또한 몽골반점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전통문화가 남아 있다.


그 전통문화 중에 팬플룻이 있고

현재 루마니아가 팬플룻의 종주국이 된다.






백제인들이 꿈꿨던 하나의 세계가 담긴 백제 금동대향로

https://youtube.com/watch?v=42uOyKB7-w4&si=DtlPIRqx09pcdj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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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들이 꿈꿨던 하나의 세계가 담긴 백제 금동대향로 [2005년 제작]백제인들이 꿈꿨던 하나의 세계가 담긴백제 금동대향로#백제 #금동대향로 #다큐멘터리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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