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예술의 정수로 여겨져
한국과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는 작품들인
미륵반가상은 한 꼭지 될 만 하기에
여기서 따로 반가상 포스팅을 하기로 한다.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하고 의자에 앉아
사유하고 있는 입체물을 말한다.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이기에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라 하고
줄여서
'미륵 반가사유상'이나
'미륵 반가상'
또는 미륵을 빼고
'반가사유상'이나 '반가상'이라 한다.
반가사유상은
만들어진 재료에 따라
크게 목조와 금동으로 나뉜다.
그래서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라 부르고
줄여서
'목조 미륵 반가상'
'금동 미륵 반가상'이라 한다.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해
중국으로 들어온 반가사유상은
처음에는 싯다르타 태자가
세속과 탈속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러다 6세기 중엽 이후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미래의 구원자,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나오기에 이른다.
그것은 도솔천에 계신 미륵부처님이
먼 미래에 지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할 일을 생각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대륙에서는 반가사유상을
태자사유상으로 부르기도 하고
먼 미래에 오실 미륵부처님이
용화수 아래에서
생각에 잠긴 모습이라는 의미로
용화수사유상(龍華樹思惟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라에서는 7세기 전후
미륵 신앙이 유행하며
미륵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다.
한국 국보 38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한국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이다.
일본 국보 광륭사(코류지) 미륵반가사유상
한국 국보 38호와 아주 닮은 미륵반가사유상이
일본의 광륭사에 있는데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두 불상 모두 머리에 삼산관 (三山冠)을 쓰고 있다.
삼산관은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반가사유상만
착용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재료면에서
우선 일본의 초기 불상들이
모두 노송나무를 사용한 것에 비하여
이 불상은 적송(赤松)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많이 산출되는 목재이다.
제작 기법면에서
일본의 초기 불상들은 몸의 각 부분을
여러 개의 나무로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기목조(奇木造) 쪽매질 기법이라는
제작방법을 쓴다.
그에 반해
이 광륭사 불상은
한 토막의 나무 전체를 조각하는
전신을 통째로 만든
일목조(一木造) 기법으로 제작돼 있다.
그리고
한국의 미륵반가상과 닮은 모습이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보아
일본 국보인 광륭사 목조 미륵 반가상은
신라에서 만들어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겠다.
츄구지의 일본 국보 흑칠목조 미륵보살 반가상
백제가 만들어 보내준
또 다른 일본 국보가 있다.
츄구지(中宮寺)의 미륵보살반가상이다.
츄구지는
쇼토쿠 태자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을
절로 개축한 곳이다.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전해지는
'미륵보살' 불상은
나무를 사용한 6세기의 작품으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오른손을 볼에 대는 듯한
부드러운 기품으로 미소 짓고 있다.
이 불상은 아스카시대 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일본 미술사상 혹은 동양의 고대미술을 다룰 경우
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일 왼쪽 ㅡ 츄구지의 '흑칠 목조 미륵 반가상'(백제)
중간. ㅡ 코류지 소장 '목조 미륵 반가상'(신라)
오른쪽. ㅡ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 미륵 반가상'(신라)
중국과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고
대련에 가서 사는 한국인이
중국 도굴품 장물 업자들에게서
고리족 유물들을 수집하게 된다.
그리고 대련에 고려박물관을 만든다.
박물관장 황희연씨 얘기이다.
그는 일제 때 간송 전형필씨와 비견되는
우리 시대의 애국 문화 수호자이다.
그는 3,000점가량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 유물이 금동 반가사유상들이다.
제일 큰 반가상은 180cm라고 한다.
이 유물들의 출처는
산동성과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라 하는데
머리에 쓴 관으로 보아
큰 반가상들은 신라계 유물이고
제일 작은 반가상은 고구려 유물이다.
이 신라와 고구려의 유물들은
대륙에서 도굴되어
해외로 밀매되어 나가기 전에
수집된 유물들이다.
대륙에도 신라와 고구려가 있었다는
증거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