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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Oct 26. 2024

한국의 건축과 미술 17   
서부 스키타이

한국의 건축과 미술 17






스키타이 제국은 크게

서부와 동부로 구분한다.








부 스키타이



서쪽으로 이주한 스키타이인들을

서부 스키타이라 한다.

기원전 1,500년

최초의 왕 타르기타오스 때부터

1,500여 년 이상을 지속했다.


영역은

오늘날에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를 기반으로 한 흑해 연안과

카스피해에 걸친

러시아의 동남부의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서부 스키타이인들은

실크로드 위쪽 초원의 길과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만들고

통제했으며,

실크로드에 걸쳐 있는

여러 문명들의 번영에 기여했다.


서부 스키타이인들은

스키타이들 중에서도

다른 스키타이들을 지배하는 권력 계층들로서

왕족 스키타이에 속한다.




기원전 7세기에, 스키타이인들은

킴메르인들과 같이 카푸카스 산맥을 넘어서

중동 지역을 자주 약탈했다.


기원전 650–630년에,

스키타이인들은 이란고원 서부의

메디아를 잠시 지배했고,

이집트 경계까지 힘을 뻗친다.


기원전 612년,

니네베를 약탈해서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 후에

아케메네스 왕조인 페르시아 제국과

잦은 분쟁 관계였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왕국에 큰 패배를 당하고

그 후에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란계 민족 사르마티아인들에게

서서히 정복된다.




기원전 5-3세기 동안에,

스키타이인들은 분명히 번영했다.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인 '히스토리'에서,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을 지나

오늘날의 돈강 하류 유역을 가로질러

돈강을 통해 동부 우크라이나와

주요 무역을 해왔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은

현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의 흑해 식민 항구들을 통하여

북방에서 그리스로 이어지는

무역 노선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곡물 재배도 했고,

그리스로 밀과 양과 치즈 등의 무역을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확실한 부를 얻었다.




스키타이의 금세공 기술도

세계 무역을 통해

활발하게 개발 및 보급되었다.

실력 좋은 마케도니아의 금속세공업자들은

그리스 식민 항구인 크림반도 연안에 정착해서

스키타이인들을 위한

휴대용 장식품들을 만들었다.

마케도니아인들의 뛰어난 예술성이

독특한 스키타이 미술 형성에

기여했다고 본다.




이렇듯 스키타이와 그리스의 활발한 교류의

가운데에 마케도니아가 있었고

마케도니아가 강대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통합할 수 있었던

배후이기도 하다.









스키타이와 페르시아의 전투


"나는 다라야와우쉬(다리우스)다.

위대한 왕이며,

왕 중의 왕이며,

파르사(페르시아)의 왕이며,

만국의 왕이며,

비쉬타스파(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아르샤마(아르사메스)의 손자로,

하카마니시(아케메네스) 가문이다."


베히스툰 비문에 쓰여 있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제7대 샤한샤(왕중왕, 제왕)인

다리우스 대제(다리우스 1세)의 자기소개서이다.

제국의 통치자답게 아주 거만하다.

실은 정통성이 없어서

꼼수로 정권을 탈취한 인물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3명의 다리우스가

그리스의 대표적 3대 전쟁에 모두 관여했다.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를 침공해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다.

다리우스 2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해군력 증강을 도와서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었으며,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

결국 자기 대에서 망국을 맞이했다.


다리우스 1세는 연이어 외치에 집중했다.

정복 군주로서

카스피해에서 인도,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판도를 넓혔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정복사업이

항상 수월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스키타이와의 전쟁에서는

이들을 정벌하기 위해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소아시아를 거쳐

발칸의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통과,

도나우 강을 넘어 북진했으나

스텝 지역의 지리에 익숙했던 스키타이는

민첩하게 페르시아군과의

정면 전투를 계속해서 피한다.


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군의 진군로에서

우물들을 메우고 식량을 남김없이 가져가면서

다리우스의 대군을 보급 곤란 상태로

텅 빈 스텝 한가운데에서 헤매도록 유인했다.

이는 몽골제국도 사용했던

초원의 유목민들이 흔히 쓰는 기본 병법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갔다가

이 전법에 호되게 당했고

히틀러의 나치군들도

모스크바를 탈환하고도 참패했다.




결국 참다못한 다리우스 대왕은

스키타이의 왕 이단튀르수스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대는 도망만 다니고 있는데

결국 다음에 말할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에게 우리 군대에 맞서

싸울 자신이 있다면

더 이상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지 말고

한 곳에서 싸우도록 하자.

만약 역부족이라고 느낀다면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그대의 주군인 내게 헌상품으로

흙과 물을 가지고 알현하러 오라.”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항복의 표시가

흙과 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는 곧 그 나라의 주권을

바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참고로 2차 페르시아 전쟁 직전에도

각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이것을 요구했고

그중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테네는 사신을 생매장,

스파르타는 This is Sparta!로

유명한 우물에 사신을 던져 죽였다.

유럽에선 왕이 영주에게 흙을 하사했는데,

이것은 그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다리우스의 편지에

스키타이의 이단튀르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자도 두려워해

도망친 적은 없소.

그냥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오.

우리나라에는 점령당하거나

황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들과 서둘러 싸워야만 되는

도시나 과수원이 없소.

우리는 그대와 싸워야 할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싸움을 피할 생각이오.

그리고 내가 주군으로서 받드는 분은

우리의 선조이신 제우스와

스키타이의 여왕 헤스티아 두 분밖에 없소."


여기서 제우스가 나오는 것은

스키타이 신들을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신들 중 역할이 유사한 걸로 번안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든 동양이든

역사 왜곡은 있어왔다.

답장은 계속된다.


"그대에게 땅과 물 대신

그대에게 합당한 다른 것을 보내 주겠소.

그리고 그대가 내 주군이라고 운운한 데 대한

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엿 먹어라’ 요.

정 그렇게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어디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 파헤쳐 보시지요.

그때 가서 내가 정말로 싸우기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겁니다."


스키타이의 무덤은 쿠르간 즉, 적석총이다.

지금도 적석을 들어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고가 든다.

적군이 못할 일을 비꼬아서 답한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이때 이단튀르수스가

땅과 물 대신 다리우스 대왕에게 보낸

합당한 다른 것이란

새와 쥐, 개구리 각 한 마리씩과 화살 다섯 대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쥐는 땅에서 살면서

사람과 같은 곡식을 먹고

새는 말과 닮았으며,

개구리는 물속에서 살고

화살은 군사의 상징이므로

즉 스키타이인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우리한테 항복하겠다고 하는

뜻이라고 이해하고 기뻐했는데,

다리우스 대왕의 측근인 고브뤼아스는

이렇게 해석했다고 한다.


이 페르시아 놈들아, 선택해라.

새처럼 하늘로 솟든지

쥐새끼처럼 땅으로 꺼지든지,

개구리처럼 물에 뛰어들든지,

이 화살에 맞아 죽든지.


전격작전을 구상한 다리우스였지만

스키타이의 힘 빼기 작전에 시간만 낭비하자

대군을 동원한 페르시아 군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소비하는 식량이 문제였다.

스키타이는

먹을 만한 것은 다 불태워버렸고

들판은 황량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퇴각했고,

스키타이군은 돌아가는 페르시아군을

지속적인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참담한 페르시아의 패배였다.


스트라본 지리지 16권에 따르면,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와 전쟁 때 스키타이군에게

똥개 훈련을 당하는 바람에

자신의 짐을 지고 이리저리 다니느라 고생한

낙타를 불쌍히 여겨

따로 집을 지어 보살펴주게 했다고 한다.




다리우스 1세 치세 말기에는

아테네가 자꾸만 반란을 부추기자

페르시아가 그리스 원정에 나섰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무참히 박살 나고 말았다.

이 덕분에 우리는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스키타이와 마케도니아와의 전투


아래는 그리스계 로마 지리학자인

스트라본 (기원전 63년경 – 서기 24년)의 저서인

지리지에 나오는 얘기들이다.


마이오티스 습지와 도나우강 사이에 있는

스키타이 부족들을 결속시킨  

스키타이의 아테아스 왕의 서방 팽창은

기원전 339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재위 기원전 359-336년)와의 분쟁을 가져온다.

아테아스는 전투 중에 전사하고,

그의 제국은 분열된다.

이 패배의 여파 속에서,

스키타이인들의 발칸 반도가

켈트인들에게 넘어간다.


한편, 러시아 남부에서는

기원전 329년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스키타이와의 이악사르테스 전투가 벌어진다.  

스키타이군은 패배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점령도 않고

스키타이 포로들을 풀어준다.

스키타이인들은 더 이상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래서 기원전 10년,

크림반도의 스키타이인들은

드네프르강 하류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새로운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우크라니아 돈강 하류와 러시아 볼가강 하류에 있는

스키타이-사르마티아 '전사들의 무덤'의 대략 20%는

남자들인 거처럼 전투 복장을 갖춘 여성들의 무덤이다.

이는 여성 전사 아마조네스들만이 사는

아마존에 대한 그리스 전설의 근거가 아닐까?





동물 문양의 가슴까지 내려오는 큰 목걸이와

스키타이 무사들의 전투 장면을 새긴 금제 빗,

기원전 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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