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스터디 7
중국 학계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하면서
홍산문화 이전의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조보구 문화(趙寶溝文化)와
요녕성 남만주 지역에 있던
신락문화(新樂文化) 등으로 이어지는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통틀어
문화(culture)의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문명(civilization)으로 간주하여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신락문화(新樂文化)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조보구 문화(趙寶溝文化)
홍산문화(紅山文化)
하가점 상층문화
하가점 하층문화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 龍蔵)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퉁화시(通化市), 적봉(赤峰),
능원(凌源), 건평(建平), 조양(朝陽) 등에서
500여 곳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의 큰 특징인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 토기와 같다는 점,
무덤은 적석총이라는 점,
그리고 옥기(玉器)는
한반도 강원도 고성군 패총에서 출토된 옥 귀걸이(8000년 전)와
전남 여수 안도리(6000년 전) 등에서 발견된
옥 장신구, 귀걸이와 유사하다는 점 등이
고조선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 관련이 있어서
동이족 문화라 하겠다.
춘천 중도 유적지 보존운동을 펴고 있는
황진주 선생은
"중도 유적도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초기 삼국시대까지
그 규모에서나 시기적으로
결코 우하량 유적에 뒤지지 않는다"면서
"그곳에 레고랜드 놀이공원을 설치하는 등
조금이라도 더 훼손하려고만 하지
조금도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며
울분을 터트리고 있다.
세계 최초의 유적 3분의 1 정도에
지자체가 레고랜드를 건설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커다란 실책이다.
뭘 위해서?
반가부좌 모습을 하고 있는 복원된 여신상,
서요하 우하량, 기원전 5,000년~5,500년
이 복원된 여신상을 처음 보고
눈을 떼지 못했으며 심한 충격을 받았다.
정좌에 손목을 부여잡고 고추선 신체에서
하체에서부터 올라온 듯한 기운이 눈으로 뿜어져 나온다.
토기로 만들어졌지만,
양 눈꼬리가 올라가고 눈알은 옥을 박아 강조를 한 점으로 보아
쏘아보는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성이 다분히 많은 작품이다.
입은 가로로 '이-----'를 발음하는 모양새로
그럴 경우 튀어나오는 광대뼈 모사를 해주었다.
'이'는 기호학적으로나 단군 때 가림토 글자의 경우,
'ㅣ', 즉, 세로 대로 표현된다.
우리말로는 짓대 내지는 줏대로
신체의 기운이 오르내리는 중심대이다.
그러나 이 토기상이 의미하는 것은
날숨 호흡법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다리가 반가부좌를 했다는 것은
기운이나 명상수련을 하고 있는 자세를 의미한다.
단군 때 있었다는 선교의 수행 모습?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 독보적인 자세이다.
수행 시, 감각을 가라앉히거나 제재해야
평정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데,
요가나 불교의 어떠한 손 자세와 다른
처음 보는 자세이다.
본인은 태견을 오래 해온지라,
인체를 쉽게 제압하는 세 가지 목인
목(아지), 손목, 발목은 알고 있다만,
내공 수행에서 손목을 제압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우하량 제2지점에서 발견된 여신상의 얼굴
우하량의 여신상, 기원전 5,000년
무릎을 꿇고 앉았지만 발가락은 받친 자세이다.
두 손을 배에 모음으로써 몸의 움직임을 자제시키고 있다.
그러에도 턱을 약간 들어 올린 상태로
내면의 체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턱을 약간 들어 올린다는 것은
요가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온 기운이
백회(정수리)로 닿기에 용이하게 해주는 테크닉이다.
감은 눈과 약간 힘이 들어간 입은
수준 높은 체험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체험 상태는
경주 석굴암 불상에서의 고요한 적멸한 공의 표현이나
우하량 여신상 1에서의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아니다.
고요한 상태와 퍼져 나가는 따뜻한 에너지의 만족감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리라.
그 시대에는 체험을 중시 여겼고
그것을 작품에 담으려고 노력했음을
이 작품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동)이족 초기 환인의 환국 시대의 유니크한 이 작품들이
사사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그중에서
최초의 현 인류 문화임에도
영적, 정신적, 물질적 그리고 문화적, 예술적으로
최상의 수준이었다는 점,
그 시대에는 체험을 중시 여겼고
그것을 작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수준 높은 영적 정신적 고유한 뿌리가 전해 내려오다가
삼국 시대에 와서는 자취를 감추게 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 환영 같은 세상은
에너지가 쇠하면 셋업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