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 2024. 5.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전
예전에 호암미술관이
현 중앙일보 건물에 있었다.
오래전에 그곳에서
'고려 불화 전'을 봤다.
해외에 있는 불화들도 총동원된
다시없는 전시회였다.
삼성이기에 해낸 일이었다.
이번 겸재 전시도
간송미술관과 협업으로
10년 준비로 이루어졌다니
다시없는 전시이다.
간송미술관은
고려자기와 조선 풍속도를,
호암미술관은
고려 불화와 금동 불상과
겸재의 주요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겸재(1676 ~ 1759)는
진경산수를 창안해서 유명하다.
그러나 학계나 미술계에서
어떻게 진경산수가 나오게 되었는지는
얘기가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시대 사회 문화를 통섭해서
답을 찾아보자.
안에서 형식과 관념으로 그리던 그림을
밖에 실제 대상을 다뤘다는 점에서,
겸재는 서양미술사로 치자면
모네와 같은 존재이다.
조선시대에는 화가가
중산층 이하의 위치였다.
겸재는 형편이 피지는 못했지만
양반 가문 출신이다.
당시의 양반들의 유흥 문화는
경치 좋은 곳에서 모임을 갖고
시를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책자로 남겨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책을 만들자면
글도 필요하지만
곁들여 사실적인 그림이 필요했다.
겸재는 그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었다.
회합첩이나 명승첩 전문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던 것이다.
겸재 전시는 화첩별로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이번에 전시된 화첩은
다음과 같다.
신묘년풍악(금강산)도첩
해악전신첩
관동명승첩
장동팔경첩
경교명승첩
화훼영모첩
동양화에서
그림을 어떤 필법으로 그리느냐 하는 것을
준법이라고 한다.
겸재는 당시 유행하던
피마준법과
미점법(米点法)을 사용하였는데
수직으로 솟아 있는
금강산 봉우리들을 그리면서
겸재 준법의 창시자로 불리게 된다.
겸재는 부분적으로 금강산을
많이도 그렸지만,
결국은 그것들을 모두 합한
금강전도를 완성한다.
금강전도에는
태극으로 구도를 잡고
가운데 무극 지점에 금강대를 배치한다.
금강전도
금강대
금강대
금강대
비로봉 금강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겸재는 반복해 그리면서
추상 단순화시키는 것을
아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에는
현대 추상화의 모습까지도 보인다.
비로봉
금강산 아래 해안 쪽에는
총석정이라는 해안 단구가 있다.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바위를
총석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정자를 지으니
총석정이다.
총석정 해안 단구
관동명승첩에도 총석정 그림이 있다.
여백의 미를 위해
주변을 삭제했다.
그리하여
여유 있는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
겸재의 여러 총석정 그림 중에
이 그림이 가장 완성된 작품이다..
총석정,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겸재는 말년에 양천 현감에 부임한다.
그곳 한강변에서 배로 유람하며 남긴
첩책이 경교명승첩이다.
동양화와 서양화가 크게 다른 점이라면,
서양화는 현시점이고
동양화는 조감 시점이라는 차이이다.
배로 유람하면 하면서
보는 시점은 현 수면 위의 시점이지만,
그림 표현은 독수리가 하늘에서 돌며 보듯,
조감 시점이라는 것이다.
조감 시점의 장점은
대상이 주변 환경 속에서
어떻게 위치해 있는지를 알 수 있고
대상의 안쪽까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겸재의 말년 그림들은
고흐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개성이 완성되어
섬세하고도 화사한
수준 높은 작품들을 보여준다.
말년에 완성한 경교명승첩은
절친인 조선 대표 시인 이병현의
글과 시가 들어 있어
그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2017년에 국가유산청에서
이 고귀한 42점의 정선 그림
명승첩을 보물로 지정한다.
아래는
보물 지정 내역이다.
정선 필 <경교명승첩>은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명소를 그린 진경산수화와 인물화로 구성된 정선의 그림이다. 1741년부터 그리기 시작해 정선이 사망한 1759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명승첩>은 화풍적인 면에서 정선 그림의 특징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특히 한강변의 명승을 그린 진경산수도에는 밝고 산뜻한 녹색과 연두색으로 칠하여 산뜻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러한 청록 담채법(淡彩法)은 정선 화풍의 지평이 확대된 면모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정선 필 <경교명승첩>은 예술적, 학술적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제작연대와 장첩의 경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같이 장첩되어 있어 완전성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지금은 훼손된 한강변의 경관을 사실적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
양화진은
지금의 외국인 묘역이 있는 절두산이다.
절두산은 인왕산의 정맥이
연대 뒷산(무악산)을 거쳐
홍대 와우산에 이르러
한강 전에 마감되는 곳이다.
현실보다 아기자기하고도
아름답게 그려 냈다.
위의 그림은
현 동작동 국립묘역의
안온한 풍경을 그린 것이다.
관악산을 뒤로하고
북동쪽으로 한강을 바라보는
둥글고 움푹한 사발형의 형세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 지형은 가운데에
달걀노른자 같은 낮은 봉우리가 있는
최고의 명당터인데,
관악산 쪽인 위쪽에
고대 고인돌군이 있음을
답사 때 발견한 바 있다.
그림 상에는
집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선 시대에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루 진'이니 광나루이다.
뒤 배경에 시루 같은 산은
고구리의 진지가 있던 아차산이다.
골짜기에 한옥들이 빼곡한 것은
양반 세도가의 별장들이다.
지금의 행주산성 앞,
배가 많은 강의 지역을 행호라 했다.
관어란 '고기 잡을 어' 자이니,
행호에서 고기 잡는 것을 지켜본다는 뜻이다.
행호에 한강이 넓어지고 고기가 많은 것은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창릉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