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스터디 18
고조선 연방
킴메르(기원전 1200년경 ~ 기원전 588년)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것은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를 주축으로 주변국들인
엘람, 페르시아, 킴메르, 스키타이이다.
킴메르와 스키타이는 동방 고조선에서 이주해 온
기마 유목 민족이었다.
특히 킴메르는 최초의 기마 유목 전투 국가로
메소포타미아 고대사에서 중요한 나라인데,
유럽 국가들은 18세기 식민지 쟁탈전 시대에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침입에 정당성을 주는데
도움이 안 되는 국가라
세계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감이 있다.
고조선 81 연방이 기록된 서적들
초기 고조선은 81 연방 체제로 구성된 여러 부족 연합체였는데,
역사적 근거와 학계 평가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 고대 사서에
단군이 세운 조선에 81 연방이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각 연방은 자치적인 부족국가 형태를 띠었고,
단군 조선은 이러한 연방체가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이란의 '살란 메다이바'와
아프가니스탄의 '호메리온 셀람'이라는
고대 역사서가 있다.
이 도서들은 감숙성 둔황석굴에서 발견되었던
고대 오리엔트의 파피루스로 만든 사서들이다.
이것을 러시아 학자가 재번역해 '오리엔트의 비밀'이라는
역사책을 모스크바에서 출간된다.
우크라이나 고대 역사서로 '마야트루 키예프'도 있다.
'마야트루 키예프'는 고대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10세기경 마자르족 문자로 옮겨 적은 석판이다.
이 석판을 다시 복사본으로 재기록한 인물은
우크라이나 고문서 연구가인 '블라디미르 포왓킨'이다.
그는 석판 중에 어렵사리 "조선이 81 연방으로 있었다"는 것을
해석해 냈고 논문으로 작성했다.
마야투르 키예프 석판
마야투르 키예프 복사본
러시아 학자 외에 최근 현지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더 사실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한다.
단군 조선 81 연방에 대해 수록한 논문들은 년대별로 다음과 같다.
1. 하이델베르크 대학 논술지, 1944
2. 키예프대학 연구 논문, 1961.
3. 도네츠크 아시아 연구소 연구 논문, 1962
4. 다베드 살람. 실 원문, 이라크 바그다드 도서관 소장, 1979
5. 테헤란 아비드다셋바드, 1993
이러한 새로운 정보들로
기존 서구 지향의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그 새로운 내용을 추려 정리해 첨부해 본다.
고조선 81 연방국
울긴(Ullgin)족 > 킴메르
우크라이나의 '마야트루 키예프'에 의하면
탱그리(단군) 조선이 81개 칸국 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고 하고
81칸국 중 하나로 울긴(Ullgin) 칸국이 있었다 한다.
울긴족은 기원 자체가 분명치 않으나
'마마야트루 키예프' 외에
'살란 메다이바'와 '호메리온 셀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서적들은
"울긴은 대대로 조선에 조공하였고 우현왕의 통치를 받았다"라고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울긴족은
사서로 기록되어 있는 유목민 중 가장 오래된 유목민이다.
그들의 흔적은 우크라이나 지역 외에 넓은 지역을 왕래한 유목민이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대학 고고학 팀은
1994년 바이칼 호수 동북부 지역에서
그들이 사냥하던 화살촉과 물품과 토기 등을 발견하였다.
그 토기들의 연대는 측정 결과 기원전 12세기로 나왔다.
기원전 12세기는 솔나 단군 시대이다.
한국의 고사서 '규원사화'에 의하면, 솔나 단군 원년에
북방 변두리 백성들을 넓은 곳으로 이주시킨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넓은 곳이라는 곳이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이다.
기원전 12세기에
바이칼 호수 동북부에서 초원의 길을 따라 이주해 온 울긴족이
도착한 곳은 초원의 길의 끝자락인 캅카스(코카서스) 북부 지역이다.
그들은 캅카스 산맥 동쪽인 키스피해 서안으로 남하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입해 정착한다.
이때 이주한 울긴족을
시리아어로는 치키미르(Chicimre)인이라 불렀고
그리스어로는 킴메르인이라 했다.
킴메르족(울긴족)의 남하
킴메르의 정착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8세기에 생겨나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제국을 세웠었으나,
기원전 12세기에는 쇠망한 상태였고
북부 갈릭 지방은 우르가 맹주였다.
갈릭 지방은 지금의 이라크의 북부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모술을 주도로 두고 있는 지방이다.
기원전 1200년경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한 킴메르족은
유프라테스강 북쪽 갈릭 지방에 정착했다.
그러나 갈릭 지방 우르의 텃세에 싸움이 시작된다.
우르와 킴메르의 56년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최후의 승자는 킴메르가 차지했다.
이 전쟁은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나오지만,
전쟁이 벌어진 지역에서 1982년에
다량의 킴메르 철기 전차와 마구도 발견된다.
그 유물들은 현 튀르키예 앙카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킴메르족은 기원전 7~8세기까지 400여 년간 통치한다.
킴메르는 당시 청동기 문화로 대변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킨 강력한 철제무기와 전차를 소유한
정복국가였다.
킴메르의 철기문화는 갈릭 지방에서 대장간이 발견되었다.
그 유물은 튀르키예 앙카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문의 멸망을 한 히타이트의 남은 유민들은
킴메르의 침공에 항복하고 그들과 섞여 살게 된다.
킴메르와 아시리아의 대결 (기원전 682년 ~ 626년)
기원전 682년,
메소포타미아 북동쪽의 도시국가인 앗수르의 세력이 커지자
킴메르 국왕 테우시파는
앗수르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공격을 결정한다.
기원전 679~678,
킴메르는 히타이트 전사들 중 기마병 7만과
킴메르 전차부대 5만을 내세워 앗수르를 정복하고
니네베에 이르러 아시리아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당시 아시리아 국왕 에사르하돈은
길가메시 서사시나 구약성경의 열왕기와 역대기
그리고 유대교 경전인 토라에 나오는
지략과 용맹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킴메르의 12만 대군을
티그리스의 살루나 계곡으로 유인하여 몰살시켰다.
이로써 킴메르는 점령했던 앗수르를 아시리아에게 준다.
기원전 676년,
킴메르는 아시리아를 뒤에 둔 채 프리기아 공격에 나선다.
기원전 674년,
킴메르는 프리기아를 멸망시키고 소아시아 전역을 지배하에 두게 된다.
그러나 후대 서양세력이 제국주의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중동에 진출했을 때, 히타이트의 멸망을
인도 유럽어 국가인 프리기아에 의해 멸망했다고 역사 날조를 한다.
기원전 654년,
킴메르의 지배하에 있던 리디아가 반란을 일으킨다.
기원전 652년,
리디아의 기게스라는 국민적 영웅의 반란은
킴메르의 막강한 기마부대와 전차부대의 위력에 참패하고
기게스는 전사한다.
그리고 킴메르는 리디아의 반란에 대해 잔혹하게 보복했다.
리디아의 수도인 사르디스를 약탈하고
도시의 남자는 모두 죽여버렸으며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팔았으며
기게스의 두골은 킴메르 국왕 엘렛마살의 술잔으로 쓰여졌다.
이것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킴메르의 잔혹함을 맹렬히 비판하며 야만인이라고 비하했다.
헤로도토스는 기마 유목 전투민족의 속성에 대해 몰랐던 모양이다.
500년 후에 흉노가 월지를 멸하고 월지의 왕의 두개골을
노상선우의 술잔으로 썼다고 사기 흉노열전에 나온다.
유목 민족의 주식은 양이다,
먹어야 사니 양을 잡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양을 잡는 모습을 보면 껍질을 벗기며 깔고
피 한 방울 바닥에 흘리지 않고 처리한다.
몸에 밴 그 생활을 야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찌 되었건,
그 보복으로 킴메르는 이오니아에 있는
그리스 식민 도시국가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644년,
이들을 접수하는 도중
아시리아가 침공하여 이오니아에서 물러난다.
킴메르는 메소포타미아 북구 영역을 두고 아시리아와
운명을 건 전쟁을 벌이게 된다.
기원전 644년 ~ 626년,
당시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정복했으며
이집트까지 세력을 확장한 강대국이었다.
아시리아와 킴메르의 18년간의 전쟁 중에
리디아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리디아 국왕으로 즉위한 알리아테스 2세가
킴메를를 몰아내고 독립했다.
킴메르는 아나톨리아의 근거를 잃고
아시리아는 킴메르를 침공하여 여러 성들을 함락시킨다.
결국 킴메르는 아시리아에게 패배하고
북캅카스와 우크라이나로 쫓겨난다.
그 해가 기원전 626년이다.
킴메르의 메소포타미아 축출
우크라이나 학자들은
킴메르가 원래 우크라이나에 있지 않았다고 하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국주위자들은 그들의 침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역사왜곡을 해왔다.
제국주의자들인 영국과 프랑스는
우크라이나에서 킴메르가 발생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내려왔다고 역사왜곡을 한다.
이는 그럴듯하지만 굉장히 심각한 왜곡이다.
이제는 그러한 제국주의적 고고학에 대해
영국 옥스퍼드 고고학자들 마저
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되었다.
양심선언인 것이다.
킴메르의 금제 비녀와 목걸이,
우크라이나 중부 체르카스크 지역의 고분, 1984년 발굴
기원전 626년
킴메르는 흑해 동쪽과 북쪽으로 밀려나 다시 재기를 꿈꾸게 된다.
아르메니아 지역에 요새를 강화시켰고
그리스령인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 이오니아 지역을 압박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몹시 두려워하여 켄테우로(악당)이라고 불렀다.
켄테우로는 그리스 신화에 켄타우로스로 나온다.
켄타우로스는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말인 신이다.
켄타우로스는 주신 디오니소스의 전차를 끌거나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꽁꽁 묶여 시달림을 당하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켄타우로스는 주색을 즐기는 동물적 열정의 노예로서,
대체로 성질이 난폭하고 제멋대로이며 무뚝뚝하게 묘사된다.
이는 말 위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며 활을 쏘는 아시아 침입자,
킴메르족 에 대한 공포에서 탄생한 신화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치욕을 준 킴메르를 격멸했기에
악몽 같은 수모를 희석시키려고 만들어진 신화인 것이다.
아테나 여신과 켄타우로스,
보티첼리, 독일 슈테델 미술관
이 긴 전쟁에서 승자인 아시리아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긴 전생 동안 점령국에게 거둬들였던 가혹한 세금과
국고가 바닥이 났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는
신바빌로니아와 메데인과 스키타이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수도 니네베가 함락당함으로 종말을 고한다.
스키타이의 출현(기원전 600년경)
한편, 그 시기에 동방에서는
북흉노의 일족 중 하나인 스케레(Scaree)족이
서서히 서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인더스 문명을 장악한 아리아인들은
그들이 인도로 내려오는 것을 밀어냈고
스케레족은 초원의 길을 따라 캅카스 지역으로 서진을 한다.
스케레는 이란어로 정복자를 의미하고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그리스어로 유목민인 스키타이(Scitaiy)라 불렀다.
스키타이족은 서부로 이동해 킴메르의 영지에 도착했고
킴메르인들은 이들을 같은 조선의 연방이라고 열렬히 환영했다.
킴메르는 스키타이를 이용해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되찾을 생각으로
스키타이인을 용병으로 고용한다.
처음에는 킴메르의 이 전략이 대체로 성공한다.
기원전 603년
스키타이와 합세한 킴메르는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와 격돌한
갈릭지방의 킴식스 전투에서 승리했고
아르메니아족의 반란도 쉽게 제압했다.
현재의 불가리아 영토까지 땅을 넓혔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약탈해 온 재물로
킴메르의 재정은 충당되었다.
스키타이 기마병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아카드의 최후'하는 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쏘는 화살을 스키타이인들은
말 위에서 빠른 몸동작으로 피하거나 화살을 손으로 잡기도 하였다."
그러한 전공을 세운 스키타이인들은 킴메르에게 보상을 요구한다.
1. 스키타이인들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해 달라.
2. 스키타이인들이 킴메르 조정에서 일할 수 있는 관직을 달라.
3. 추가로 킴메르의 영지에 동족들이
새로 국경을 넘어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
그러나, 킴메르는 이 같은 요구를 거부한다.
이는 곧 킴메르의 종말이라는 후폭풍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