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스터디 19
기원전 588년,
현 우크라이나 중앙부에 있는 킴메르의 수도인 카치오프는
스키타이인에 의해 불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주요 요새에서는 스키타이 용병들의 반란으로
킴메르는 순식간에 멸망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을 서술하면서
킴메르가 스키타이 이전 북쪽을 지배했던 기마민족이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킴메르는 스키타이의 침입을 받고 상류층들은
스키타이와 싸울 것을 주장했고
백성들은 피난 갈 것을 주장했는데,
왕족들이 스키타이족과 싸우다 전멸하자
백성들은 왕족들을 묻어주고 피신했다 라고 한다.
스키타이의 도륙은 스루브나 문서 번역본에
'메두바(지옥)의 대학살'로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 킴메르인들은 학살로 인해,
피가 늪이 되어 흐르고 살점은 나무에 걸렸으며,
뼈와 해골은 스키타이인의 왕궁 장식으로 쓰였다."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국립대학 철학연구소의
미하일로프 로스엘라츠키의 '킴메르인의 사후 세계관에 대한 연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기 3일 전에 하늘에서 검은 옷을 입은 선인이 내려와
망자의 영혼을 데려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죽은 후 검은 옷을 입은 선인이
그 망자의 영혼과 49일 동안 지상 곳곳을 같이 돌아다니며,
살아생전 추억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게 하고
49일 후에 그 영혼과 함께 승천한다.
지상과 지하를 주관하시는 탱그리(하느님)의 배려와 은혜로
이후 매년 망자가 죽었던 날 하루만 지상에 내려와
살아있는 망자의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이에 하늘과 땅의 모든 종족들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 내용은 한국의 사후 49제 그대로이다.
이는 한국의 49제 풍습이 단군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 체코(보헤미아) > 마케도니아
킴메르의 왕정은 거의 도륙을 당했으나
마지막 왕인 슈우발카 5세의 7번째 아들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킴메르의 지배세력을 이끌고 보헤미아(현 체코) 지방으로 도망한다.
그들은 보헤미아인과 통혼하여 오늘날 체코인의 조상인
고트인이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카를라우 발류의 연구 논문 '고대 체코의 역사',1994)
고트족의 생성과정이 킴메르인들이라는 것은
세계사에서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후에 훈족의 침입으로 고트족이 밀려나며
고트족에 의해 서로마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고조선 > 스키타이 > 킴메르 > 고트족 > 서로마의 멸망
그 이후 보헤미아(체코)의 킴메르인들은 부족 간의 갈등으로
일부가 대거 그리스 북부로 남하하게 되고
그곳의 도리아인를 정복하고 그들과 연방공동체를 형성한다.
그것이 '마케도니아'이다.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어로 공동체를 뜻한다.
그리스 위에 갑자기 강대한 전투력이 생긴 원인은
자체 생산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킴메르 잔여 세력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1982년
아나톨리아 시리아 북부의 주요 도시인 모술에서 튀르키에 앙카라에
이르기까지 다량의 철기전차와 마구가 발견되었는데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9세기였다.
우크라이나 체르카스크 고분의 마구와 전차와 일치하는 것으로
킴메르의 유물로 확정되었다.
이 역사적인 발굴 유물은 터키 앙카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스키타이에 밀린 킴메르족의 이동 경로는
흑해 북쪽과 코카서스 북쪽의 카스피해 스텝 지역에서 시작하여
서쪽과 남쪽으로 분산되었다.
동쪽으로 이동한 킴메르는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진출했다.
서쪽으로 이동한 킴메르인들은 동유럽의 중부 및 남부 지역으로 진출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현재의 독일, 오스트리아 주변까지 진출했고,
이곳에서 오늘날 켈트족 문화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서양 학계는 킴메르족이 스키타이족에게 밀려난 후
서남쪽으로 이동한 킴메르족 일부는
유럽 중부와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하여
켈트족과 이탈리아족의 공통 조상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킴메르족의 철기 문화와 유럽의 할슈타트 문화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고 유럽 학계는 주목하고 있다.
킴메르족이 유럽 최초의 철기 문화인 할슈타트 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킴메르족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으로,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기원전 8세기경에는 철기도 사용했다.
이 철기 문화는 유럽 최초의 철기 문화 중 하나인
할슈타트 문화의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할슈타트 문화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유럽에서
기원전 12세기 이후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까지
이르는 시기의 문화로, 켈트어족의 문화 정체성의 시발점으로 간주된다.
위의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유럽 고대 문화의 많은 의문점들이 해소된다.
그 의문점은 영국의 본래 조상이 캘트족이라는 점과
프랑스 꺄르낙에서 영국까지 이어지는 캘트족 루트에 있는 광대한 선돌의 유적
그리고 프랑스에 남아 있는 코냑과 꺄르낙과 같은 지명이다.
게다가 프랑스 숭상하는 동물이
고조선의 후예 부여의 장닭(숫닭)과 동일하다는 점 등이다.
유럽 켈트족 분포도(옅은 녹색)
기원전 12세기에 킴메르인이 정착한 땅에는
지금도 그들의 후예가 어렵사리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위치는 터키, 이라크, 시리아, 아르메니아의 경계에 걸쳐 있다.
대영제국이 중동에서 발을 빼면서 설정한
중동 국가들의 경계선의 최대 피해자가 바로 쿠르드족이다.
쿠르드족은 강인한 민족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 대표적 인물이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쿠르드족의 영웅은
살라딘(Saladin, 살라흐 앗딘)이다.
살라딘은 아유브 왕조를 창시하여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를 통합하고,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주력을 격파하며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이슬람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쿠르드족은
수많은 세월의 이슬람 국가들의 끊임없는 핍박 속에서도
그 한 복판에서 자신들의 본연의 문화와 정신을 잃지 않고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어 왔다.
소비에트연방 체제 하에서
관습과 역사를 버리도록 강요받았으나 지켜냈다.
오늘날 쿠르드족은 약 3,500~4,0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전체 인구의 45%는 터키, 24%는 이란,
19%는 이라크, 6%는 시리아에 거주한다.
이들의 언어, 문화, 사회적 결속력은 높은 편이나,
민족 국가 권리와 국제사회 지위는 여전히 미흡하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오랜 분산과 배신, 그리고 독립 투쟁의 연속이며,
중동사에서 빈번한 정치적 이용과 탄압의 대상이 되어온
비극적 서사로 점철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쿠르디스탄 독립을 약속했으나,
1923년 로잔 조약에서는 서구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이 약속이 폐기되면서 쿠르드족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
여러 나라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각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며 지속적으로 독립과 자치 요구를 해왔으나,
석유와 전략적 요충지와 겹치는 쿠르드 거주지의 특성을 가진 탓에
독립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미국은 용맹한 쿠르드족을 이슬람 국가(IS) 격퇴를 위한
중요한 군사적 동맹으로 활용했으나,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이라크와 터키, 이란 등이 반발할 것이라는 이유에서 선을 그었다.
2019년 시리아 북부 미군 철수 결정 등으로
쿠르드족과의 관계에서 전략적 재조정을 한다.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것이다.
쿠르드족은 전통문화를 잘 지켜오고 있는데,
그중 카발(Kaval)이라는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쿠르드족의 팬플루트 악기가 있다.
쿠르드족의 카발의 기원은 기원전 1,200 년 고조선 시대이니
역사로 고찰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팬플루트이라 할 수 있다.
카발(Kaval):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쿠르드족의 관악기
악기 상부에 두른 띠의 문양 X는 진리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고조선의 옛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