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에 눈물짓는 40대 아줌마의 고백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패기라는 이름으로 무장하고, 세상 어디에도 굴하지 않을 것 같던 20대.
언론사에 들어가 기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기사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도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하루 종일 스트레이트 기사 하나 붙들고 씨름하다 선배와 술잔을 기울이던 자리에서,
나는 무심한 듯 툭 내뱉었다.
"저는 드라마가 싫어요. 출생의 비밀, 불륜… 그런 저급한 얘기를 왜 봐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나는 또래 아이들이 빠져 있던 연예인, 우정 다툼, 스티커 사진 같은 것들을 어른스럽지 못한, 시시한 것들이라 치부했다.
나는 더 고차원적인, 철학적 사유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내게 기자라는 직업은, 나의 우월한 가치관을 증명해 줄 직함처럼 느껴졌다.
선배는 잠시 술잔을 내려놓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드라마를 보시는 부모님도 저급해?"
그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
매일 거실을 울리던 아침드라마의 요란한 주제가가 귓가를 때렸다.
청력이 약해졌다며 TV 소리를 쾅쾅 울리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안까지 차올랐던 말은 꿀꺽 삼켰다.
'맞아요. 저희 부모님은 그럴듯한 취미도 없으시고, TV만 보시는 게 안 좋아 보여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선배 앞에서 패륜처럼 비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쉼 없는 회사 생활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40대가 되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루 종일 멈추지 않고 뛰는 듯한 나날들.
숨 고를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드라마를 앉아 볼 여유는 사치였다.
대신 출퇴근 지하철에서, 혹은 잠시 짬이 날 때마다 나는 웹소설과 웹툰을 펼쳤다.
마법사와 수인이 등장하고,
한때 사랑했으나 헤어졌던 연인이 기적처럼 다시 만나 사랑을 이어가는 이야기.
도저히 현실에서는 일어날 리 없는, 유치하고도 환상적인 세계.
그 속에 나는 빠져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에 빠져드는 나도 저급해진 걸까?'
출산과 육아, 직장이라는 삼중주의 굴레 속에서 내가 택한 해방구는 술이었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혹은 저녁밥상 앞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남편이 미워졌다.
아이마저 짐처럼 느껴졌다.
지워도 지워도 다시 얼룩지는 마음 같았다.
그때 우연히 읽은 웹툰 속 이야기.
젊은 시절 연인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나는 오래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피곤해도 상대가 더 힘들까 걱정하던 날들.
기차역에서 손을 흔들며 아쉬워하던 순간들.
그 기억이 떠오르자 남편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인데, 왜 그토록 미워했던 걸까.
엄마를 잃은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 웹툰을 보며, 나는 눈물이 났다.
아이의 세상은 엄마 하나일 텐데, 왜 나는 내 아이를 짐처럼 느꼈던 걸까.
아이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을 텐데.
그 단순한 진실조차 외면했던 나를, 만화 속 이야기가 일깨웠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눈물이 많아졌다.
출생의 비밀, 부모를 잃은 아이, 억울한 오해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
그 유치한 설정들이, 어느새 나의 눈물 버튼이 되었다.
혹시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보며 눈가가 붉어진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게 나일 것이다.
(모른 척해주세요. 부끄러워요...)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드라마나 웹툰, 웹소설이 유치하고 허황돼 보여도,
그 안에는 무뎌진 감정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 유치한 이야기들이 내 추억을 소환하고,
지친 현실 위에 색을 입혀,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네준다는 것을.
그래서 반성한다.
오만했던 내 20대를.
오만한 마음으로 기사를 쓰던 그 시절의 나를.
이제 나는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서 눈물짓고 위로받는,
그저 평범한 40대 아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