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인을 능가한 정치인들
지금은 덜하겠지만
내가 대학을 다녔을 때는
대부분의 학생이 진보정당 지지자였다.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은 욕먹을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아버지에게 조선일보를 왜 보냐며
바락바락 대들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선일보가 면수도 많고 볼 게 많아"
그 말은 나에게 변명처럼 들렸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꼰대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돼
국회에 출입하게 됐다.
내가 맡은 출입처는 민주당이었다.
내 성향과 잘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회를 출입하면서 본 풍경은
내가 생각했던 정치인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2010년대 초반
한·미 FTA를 격렬하게 반대하던
민주당을 보면서 참 열심히들 하는구나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그때는 FTA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잘 몰랐으니까.)
그런데 반전은 국회 상임위원회 취재 과정에서 벌어졌다.
지금은 국회에서 몸싸움이 없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국회 내에서의 몸싸움은 다반사였다.
한 번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실에
취재하러 들어갔다가
몸싸움에 휘말리게 됐다.
왜소한 체격의 여성인
나는 회의장에서 몸으로 막는 민주당 보좌진과
밀어대는 한나라당 보좌진 속에서
어쩔 줄 몰랐다. (안 맞은 게 다행이다.)
그때 나를 감싸준 것이 민주당의 한 여성 보좌진이었다.
(날 안아줬던 언니, 아직도 잊지 못해요. 너무 감사했어요… 또르르)
여기서 상황이 끝났다면 나는 영원한
민주당 지지자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취재카메라가 있는 곳과 없는 곳에서의
국회의원들의 행동은 너무 달랐다.
무슨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것 마냥
카메라가 있을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카메라가 사라지면 한나라당과도 친구가 된다.
(그분, 지금은 장관님이 되셨죠...)
그런 상황은 계속 눈에 띄었다.
내 눈에는 줏대가 없어 보였다.
여야가 어떤 정책을 내놓더라도 절대 선과 악은 없었다.
의원들은 정치 상황과 당론에 따라 움직였다.
결국 카메라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광대였던 셈이다.
이 현실을 눈앞에서 보자
회의감이 들었다.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지?
언론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를 나눌 필요가 뭐가 있을까?
기사마다, 기자마다
색깔이 다 다른 것을.
처음에는 나 자신이 무언가 고고한 뜻이 있어
기자 일을 시작한 것 아닌가라는
착각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다 똑같았다.
먹고살기 위한 직장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월급 잘 받고 대우가 좋으면
좋은 기사가 나오는 것이고,
박봉에 시달리면 그저 그런 기사가 나온다.
누군가 나를 속물이라 할 수 있지만
현실이 그렇다.
당장 이번 달 월급이 안 나오면 카드값이 걱정된다.
아이 학원비가 걱정된다.
직장인의 입장에서
월급은 내 가치를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내가 일을 하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된다.
그런데 박봉을 받으면서 동기부여가 될까?
기자로 살다 보니 알게 됐다.
모든 매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수라고 알려진 매체가 기자의 연봉 등
대우에 더 신경 쓰고
진보라고 불리는 매체가 의외로
기자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일이 잦다는 것을.
오래된 일이다.
진보 매체 중 한 곳이 월급도 제대로 안 나와
기자들이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좋아했던 매체였는데,
열정페이를 강요하다니…
진보의 민낯을 보는 것만 같았다.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기자가
취재원에게 당당하게 어깨 펴고
질문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서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인 사람은
진보와 보수가 의미 없다.
월급 잘 주고 어깨 펴고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 최고다.
정치도 마찬가지 아닐까?
조선시대, 임금의 최우선 덕목은 '민본(民本)'이었다.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미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가와 주거 안정, 경제활성화가 정부의 최우선 과제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살림하고, 아이 키우고, 맞벌이하고
매일 같이 전쟁 같은 삶은 사는 내게
진보와 보수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삶과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정치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