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효원 Jul 21. 2024

⑪비오는 날의 텃밭 랩소디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나의 오래되고도 고질 병적인 습관이 하나 있으니 바로 정의하기다. 어떤 깨달음이 오면 전광석화처럼 정의를 내린다. 오죽하면 친애하는 후배 임모 군이 “제발 정의 좀 내리지 말라”고 읍소했을 정도.

마당 곳곳에 커다란 통을 놓고 빗물을 받아두었다가 텃밭에 물도 주고 걸레도 빤다. 사진=김효원


이 습관은 20대에 시를 쓰며 생긴 게 아닐까 싶다. 일상에서 빛나는 은유와 직유, 환유, 상징 같은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전전긍긍하다 무엇이든 정의해야 하는 몹쓸 병을 얻고 말았다.


임 군은 나에게 ‘깨달음 전문가’라는 별명을 지어주면서 “오늘 깨달음을 까맣게 잊고 내일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것이므로 결국 아무 소용이 없는 깨달음의 연속 아닌가”라는 매우 철학적이면서도 본질에 근접한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태연한 척 “이번 깨달음은 한 달 이상은 갈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라고 항변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는 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금세 또 다른 깨달음이 오고야 말았다. 깨닫고 싶지 않았는데 저절로 깨닫게 됐다. 다시 정의하건대 ‘농사는 날씨’다.


농사는 농부가 짓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날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사 입문 두어 달 만에 이런 사실을 깨쳤다니 거의 신동이 아니냐고 이 어리지 않은 연사는 외쳐본다.


도시의 삶이란 사실 날씨가 큰 상관이 없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들어가면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날씨가 아무리 가물어도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싱싱한 과일 채소가 현관문 앞에 당도한다. 출근 전 날씨 앱을 확인하는 것은 우산을 챙길까 말까를 결정하기 위해서고, 주말의 날씨를 검색한다면 그건 야외로 나들이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는 날씨가 활동의 대부분을 가른다. 해가 쨍쨍하면 씨앗이나 모종을 심거나 김을 매고 비가 오면 활동을 중단하고 쉰다.


물이 얼마나 소중한 지 새삼 느끼게 된 것도 땅에 뭔가를 심고 나서부터다. 텃밭의 온갖 작물들은 모두 물을 먹고 자란다. 물이 부족하면 시들시들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처음에는 수돗물을 받아서 텃밭 작물들에 물을 줬다. 텃밭 작물이 흡족해할 때까지 실컷 물을 먹이기도 전 수도세 걱정이 들어 슬며시 물을 잠그고 말았다.


저절로 물을 아끼는 사람이 됐다. 동생은 싱크대 옆에 플라스틱 통을 넣고 채소 씻은 물, 쌀 씻은 물을 따로 받아놓기 시작했다. 주방 세제를 사용하지 않은 물은 모두 텃밭용으로 모아둔다. 서울에서라면 즉시 하수도로 내려갈 물을 한 번 더 사용하는 것은 조금 번거롭지만 기분은 매우 근사한 일이다. ESG를 실천하는, 지구에 무해한 인간형이 된 것 같은 웅장한 마음이 따라온다.


비 오는 날은 빗물을 받는 날이다. 마당 곳곳에 큰 통을 놓고 빗물을 받는다. 처마에서 모여서 내려오는 빗물은 양이 제법 되기에 커다란 통도 금방 찬다. 빗물이 가득 차면 마치 냉장고에 밑반찬을 가득 채워둔 양 든든하다.


엄마가 온갖 걸레를 들고 집안과 들락날락하는 것도 그때다. 온갖 먼지는 모두 퇴출시키겠다는 의지로 엄마는 걸레질을 하고 또 한다. 걸레질을 한 걸레는 받아 놓은 빗물로 빤다. 빗물이라고 이렇게 헤프게 써도 되나 싶게 엄마는 걸레를 여러 번 빤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늘 빗물을 받아두셨다. 그 빗물을 아까운 줄도 모르고 홀랑홀랑 쏟아버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빗물을 받아둔 통에는 항상 모기 유충 같은 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왜 더러운 빗물을 받아두어 모기 온상을 만드시지?” 늘 의문이었다.


물을 다 쏟아버리면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 없었다. 앞으로 탄생할 모기를 100마리쯤은 미리 퇴치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그때 아버지처럼 우리가 빗물을 받는다. 빗물도 아까워 아껴가며 텃밭에 물을 준다.


비 오는 날은 농사꾼이 쉬는 날.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오도이촌인 우리 가족은 비 오는 날에도 쉴 틈이 없다. 집안을 깨끗하게 쓸고 닦는 것은 물론이고 텃밭 김 매기도 “비 오는 날이 더 좋네” 하고 달려 나간다. 비 내리는 날 풀을 뽑으면 힘들이지 않아도 쏙쏙 잘 뽑힌다.


역시나 비 오는 날 비 맞으며 일하는 사람은 우리 가족들밖에 없다.

이전 10화 ⑩벌에 대차게 쏘인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