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오늘은 호박 도래적 부쳐라.”
어린 시절, 3대가 모여 살던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 말씀이 법이었다. 할아버지는 대사는 물론 소사에 이어 초초초 소사인 매일의 메뉴까지도 결정했다.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할머니와 엄마는 명령받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텃밭으로 뒤란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여름에 할아버지가 자주 주문한 음식이 호박 도래적이다. 호박 도래적은 왜 호박 도래적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강원도에서는 전을 거의 적이라 불렀으니 기름 넣고 지지는 음식을 말할 테고 도래는 뭘까, 사전을 뒤적여봤다.
1 어떤 시기나 기회가 닥쳐옴. 2 물을 건너옴. 3 문이 저절로 열리지 못하게 하는 데 쓰는 갸름한 나무 메뚜기. 4 어장. 5 둥근 물건의 둘레. 6 도라지의 방언(경상). 7 가랑이의 방언(함경). 8 도랑의 방언(함북). 9 규, 걸음쇠. 10 수선의 방언(함남). 11 두레의 방언(경남). 12 둥근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13. 낚싯줄이 꼬이지 아니하고 자유로이 감겼다 풀리도록 낚싯줄의 굴레와 고삐 사이를 이은 물건.
도래에 둥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호박을 둥글게 썰어 부치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해본다. 둥근 모양이라는 점에서 호박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호박전은 달걀물을 입히고 호박 도래적은 밀가루 반죽을 쓰는 것이 다르다. 또 하나 결정적 차이라면, 호박전은 애호박으로 만들어 한입 크기의 앙증맞은 모양이지만 호박 도래적은 조선호박으로 만들어 지름이 20cm 정도가 되는 큼직한 크기를 자랑한다.
할머니는 텃밭에 나가 조선호박을 따오고, 엄마는 화로에 불을 피운 다음 솥뚜껑을 걸었다. 호박을 동글납작하게 썰어 굵은 소금을 조금씩 뿌려 재우는 동시에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을 만든다. 이때 밀가루 반죽은 너무 묽지 않게 점도를 조절해야 한다. 너무 묽으면 반죽이 호박에 달라붙지 않고 흘러버린다. 밀가루 반죽에는 소금을 넣지 않아도 된다. 마늘, 고춧가루, 파, 매운 고추를 쫑쫑 다져 넣은 양념간장에 찍어 먹기 때문이다.
솥뚜껑이 달아오르면 들기름을 두르고 호박을 가루 밀가루에 굴렸다가 밀가루 반죽을 묻혀 지진다. 호박에 가루 밀가루옷을 입혀야 밀가루 반죽이 호박에 딱 달라붙는다. 들기름을 넉넉히 둘러서 튀기듯 지져야 더욱 맛있는 호박 도래적이 만들어진다.
막 지져낸 호박 도래적은 그 자리에서 후후 불어가며 먹어야 제맛이다. 바삭한 밀가루 반죽 속에 말캉하게 익은 호박이 향긋하고 고소해 앉은 자리에서 한도 끝도 없이 먹을 수 있다.
올여름, 첫 호박 도래적을 부쳤다. 올해는 직접 키운 호박을 텃밭에서 따서 만들었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호박 도래적이 됐다.
이 호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5월에 텃밭 가장자리에 5개쯤 씨앗으로 심었더랬다. 비료도 거름도 하지 않은(사실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못 한) 밭이라 그랬는지 7월까지도 자라는 게 보잘것없었다.
“우리 집 호박은 한 개도 안 달리네. 호박 농사도 어려운 거였어!”
그렇게 호박 농사도 실패 쪽으로 분류하려던 차였는데, 8월을 맞아 내려가 보니 호박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 텃밭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분명 텃밭의 가장 구석 자리에 지붕을 타고 올라가라고 심은 호박은 지붕을 거부하고 텃밭으로 진격해 작약을 덮고 마를 덮고 토마토와 가지를 공격 중이었다.
무성한 호박잎을 들춰보니 주먹만 한 호박이 제법 달려있다. 따는 시기를 놓쳐 늙어가고 있는 호박도 있었다.
올해 호박 농사는 성공으로 분류했다. 성공은 성공인데 절반의 성공이다. 호박이 타고 올라갈 줄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않아 텃밭의 다른 작물들을 마구 뒤덮었기 때문이다.
텃밭 중앙까지 진격한 호박줄기를 잡아채 방향을 돌려놓고, 지나치게 무성한 줄기는 눈물을 머금고 잘라냈다. 그날 농사 일지에는 ‘호박은 뒤란 외진 곳에 심을 것. 어마무시하게 자리를 차지함’이라고 적어놓았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호박으로 호박 도래적을 만들었다. 호박 도래적을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한 겉면과 달리 속은 부드럽고 촉촉하다. 호박의 은은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코를 스친다.
“오늘은 호박 도래적 부쳐라” 하시던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막걸리 안주로 호박 도래적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도 안 계시지만 호박 도래적을 먹으며 두 분을 떠올릴 수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