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고향 집 마당에는 ‘고야’가 산다.
고야라고 하면 으레 에스파냐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년 3월 30일~1828년 4월 16일)를 떠올리게 된다. 스페인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종교화를 비롯해 초상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근대 미술의 창시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옷 벗은 마야>가 대표작이다. 오래 전 돌아가신 분이, 유럽에서 강원도 산골에 와서 살 리는 없으니 화가 고야는 아닌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고야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나 고양이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고향 집은 오도이촌인 관계로 동물을 키우기 어렵다.
강원도 영월의 고향 집에 사는 고야는 화가 고야도, 강아지나 고양이의 이름도 아닌, 어렸을 때 ‘꼬야’라고 불렀던 '강원도 토종자두' 고야를 말한다.
봄이면 작고 앙증맞은 흰색 꽃이 화사하게 피고 7월에는 열매가 빨갛게 익어 툭툭 떨어진다. 자두와 닮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비교가 안 되게 작다. 대부분 100원짜리 동전 크기 정도다. 큰 놈이라 봐야 500원짜리 동전 크기쯤 될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파는 추희자두, 후무사, 대석자두 같은 자두가 달걀이나 테니스공처럼 큼직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잘아서 얕잡아보게 되지만, 입에 넣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일반 자두보다 새콤한 맛은 덜하지만 향긋하면서 달콤한 맛이 있다. 과하게 달지도, 과하게 시지도 않고 육질이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적당하다. 알이 작기 때문에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어린 시절, 고야는 심심한 입을 달래주는 군것질거리로 제격이었다. 마을에서 읍내는 약 10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오가는 버스는 하루 두 번이 전부였다. 장날에 농기구 사러 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가 짜장면을 얻어먹는 날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마을에 딱 하나 있는 구멍가게에는 라면이나 과자가 있었지만, 그걸 사 먹을 수 있는 용돈이 없었다.
앵두, 오디는 진즉 떨어졌고 복숭아나 사과는 익으려면 아직 멀어 입이 궁금할 때 고야가 좋은 간식거리였다. 한 바가지 주워다 놓고 동생들, 동네 친구들과 마루에 엎드려 집어 먹으면서 씨를 누가 더 멀리 뱉나 내기를 하곤 했다. 간식과 놀이를 동시에 하니 원 소스 멀티 유즈라고나 할까.
고향 집 수돗가 옆에 자리한 고야 나무는 아마도 나이가 50세는 족히 될 듯하다. 1990년 초,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도 고야를 따먹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원 가지는 죽고 곁가지만 겨우 살아 나무 모양은 볼품없지만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열매를 내어주는 기특한 녀석이다.
늙은 고야 나무 옆에 삼총사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앵두 나무와 옛날 작두펌프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앵두나무는 진즉 죽었고, 작두펌프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옛날 물건 사러 다니는 방물장수가 팔라고 간청해서 2만원에 파셨다고 했다. 작두펌프의 빈자리가 허전해 중고 장터에서 비슷한 물건을 구하려고 알아보니 20만원이 넘었다. 그나마도 지금은 다 팔려나가서 물건을 구할 수가 없다. 당근마켓에 알림 설정을 해놓았지만 작두펌프를 파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야가 거의 사라진 것은 효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량을 통해 점점 커진 자두가 사랑받으니 먹을 것 없는 고야는 설 자리가 없었겠지. 효용이 없다고 사라지는 게 당연한 세상은 슬프다.
고야를 먹고 씨앗을 알뜰히 받았다. 강원도 토종 자두 나무를 내 손으로 키워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화분에 심고는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며 새싹이 나오길 기다렸다. 아무래도 싹이 나오지 않아 검색해보니 자두 같은 핵과류(부드러운 과육 속에 단단한 핵으로 싸인 씨가 들어 있는 열매)는 딱딱한 껍질을 깬 후 심어야 발아가 잘 된다고 한다.
망치로 겉껍질을 깬 후 속에 있는 씨앗을 화분에 잘 심어놓았다.
고야는 언제 잠에서 깰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