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농약, 비료는 지구에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약, 비료 없이 키운 농산물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허술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 직접 농사를 지어보니 알겠다. 채소, 과일이 자라는 과정에서 농약, 비료가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몰랐다.
또다시 정의 내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데, 농사는 벌레와의 전쟁이다.
어쩌다 손바닥만 한 농사를 시작하며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방법으로 채소를 키우기 위해 애썼다. 제초제를 치지 않고 매번 땀을 흘려가며 손으로 풀을 뽑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나 벌레떼의 공격에는 굴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맨 처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케일 벌레였다. 파릇파릇 싱싱하게 자란 케일을 기대하고 텃밭에 나갔는데, 이게 웬일. 벌레가 잎을 모두 뜯어 먹어 잎은 없고 잎맥만 앙상하게 남았다. 상추는 멀쩡한데 케일만 뜯어 먹은 걸로 봐서 그 애벌레는 건강 추구형인 것 같았다. 케일이 간에 좋은 건 어찌 알았는지.
케일에 생긴 벌레는 벌레월드 초급단계였다. 케일에 달라붙어 있는 배추흰나비 애벌레를 나무젓가락으로 잡아주기만 하면 됐다. 이때는 꼬꼬(닭)가 살아있을 때여서 잡는 족족 꼬꼬 먹이로 주면서 1석2조라고 좋아할 여유도 있었다.
얼마 후에는 생울타리로 심어놓은 사철나무가 벌레의 공격을 받았다. 70cm 정도 크기를 울타리로 심어놓고 부지런히 자라 외부 시야를 완벽히 차단해주기를 기다리며 애지중지하던 사철나무였다. 시골집에 갈 때마다 얼마나 컸나 점검하는데 잎이 듬성듬성해진 게 아닌가. 이상해 잎을 뒤집어보니 애벌레가 득실득실 붙어있었다. 마치 송충이처럼 생긴 퉁퉁한 벌레였는데, 검색으로 찾아보니 노랑 털 알락 나방 애벌레라고 했다.
노랑 털 알락 나방 애벌레는 숫자가 하도 많아 일일이 손으로 잡아줄 수가 없었다. 나무를 흔들면 애벌레가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 실 한 줄을 제 몸에 묶고 허공으로 뛰어내렸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벌레를 손으로 훑어 물에 넣었다.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잡아도 벌레의 번식이 더 왕성했는지 사철나무 잎은 나날이 줄었고 외부 시야 차단의 꿈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화룡점정은 미국선녀벌레가 장식했다.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자 초대받지 않은 손님 미국선녀가 시골집에 나타났다. 이름은 예쁘기만 한 미국선녀벌레가 그렇게 흉측한 모습일 줄이야.
두릅나무에 하얀 가루가 가득 뒤덮여 있어 가까이 가보니 살아 움직이는 벌레였다. 미국선녀벌레는 알에서 막 깨어난 유충일 때는 흰색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자라면서 점점 크기가 커지고 연두색이 진해진다. 다 자라면 회색 나방이 돼 날아간다.
나무에 붙어있는 미국선녀벌레는 수십, 수백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바라보기에도 부담스럽다. 심지어 잡으려고 손을 대면 사방팔방으로 톡톡 튀어 달아나기까지 한다.
두릅나무를 유난히 좋아하는지 모든 두릅나무는 미국선녀벌레에 점령당했다. 그렇다고 다른 나무가 무사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감나무나 뽕나무, 심지어 가지에도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채소 잎사귀, 나뭇잎마다 붙어있는 벌레를 보며 유기농 농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화학약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건강한 농산물을 키워내는 분들을 새삼 존경하게 됐다.
농사가 크지도 않고, 농사지어 어디에 내다 팔 것도 아니니 천연 해충 방제법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난황유부터 시작했다. 난황유는 달걀과 식용유를 섞어 만든다. 기름 성분이 벌레의 입을 막아 질식시키는 원리라고 한다. 달걀과 식용유를 섞어 시판하는 마요네즈를 사용하면 아주 간편하게 난황유를 만들 수 있다. 페트병에 난황유와 물을 넣고 섞어 희석해 벌레가 낀 나무에 뿌리면 된다. 난황유를 뿌려본 결과 벌레를 완전히 박멸하지는 못했지만 개체수가 조금 줄어드는 효과를 봤다.
은행잎도 해충 방제 성분이 있다고 해서 시도해봤다. 마침 시골집 뒷동산에 은행나무가 있다. 우리 집 은행나무는 암놈이라서 가을이면 엄청나게 많은 은행을 선물해준다. 마을 초입 파출소 앞에 있는 은행나무가 신랑 나무다. 우리 집 사위 나무라고 생각하니 마구 정이 가 파출소 앞 은행나무를 지나갈 때마다 말을 시키곤 한다.
초록 은행잎을 따서 물에 삶은 후 그 물을 뿌리면 된다고 해 은행잎을 가마솥에 넣고 삶았다. 은행잎을 삶고 있자니 왕궁에서 중전의 지시로 몰래 사약을 만들고 있는 김 상궁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은행잎 삶은 물도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
마지막은 미국자리공이다. 미국자리공 역시 해충 성분이 뛰어나다고 한다. 뿌리나 열매는 독성이 커서 실제 사약 만드는 데 쓰인다고. 뒷동산에 자라고 있는 미국자리공은 아직 열매가 익지 않아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벌레가 대부분 사라졌다. 천연 해충 방지법을 열심히 해서 벌레를 모두 퇴치한 것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엄밀히 말하면 벌레들은 잘 먹고 잘 자다가 떠날 때가 되자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