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8월 말 9월 초는 봄여름 농사와 가을겨울 농사가 바통 터치하는 시기다. 봄여름 농사를 얼추 마무리하고 한 해 농사의 대미라고 할 수 있는 김장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1년이 12개월이니까 봄여름가을겨울에 각각 3개월씩 배정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짧은 봄, 긴 여름, 짧은 가을, 긴 겨울의 구성이란 걸 알 수 있다. 특히 가을은 9월에 시작해 10월이면 끝나니까 겨우 두 달 남짓이다. 이 짧은 시간에 긴 겨울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가을 농사다.
5월에 심었던 상추, 케일,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같은 채소들은 이제 끝물이다. 열매채소는 아직 열매를 내어주고 있지만 맹렬하던 성장이 끝나고 소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다. 상추는 무더위에 진즉 녹아 없어졌다. 벌레의 공격에 앙상한 줄기만 남은 케일도 더 이상 밭을 차지하게 둘 이유가 없다.
배추를 심기 위해 8월 15일에 모종판에 모종을 냈다. 파란색으로 코팅된 배추 씨앗을 모종판에 한 알씩 넣고 흙을 덮어준 후 물을 살살 뿌려주며 키웠다.
새싹은 3일 만에 나왔는데 매일 물을 줘야 하므로 시골집에 둘 수가 없어 자동차에 싣고 서울로 가져왔다. 물 주기 당번에 당첨된 동생이 모종판을 아파트 베란다에 두고 매일 물을 주며 2주 넘게 키운 배추 모종이다.
8월 31일 오후 4시 반. 쨍한 햇볕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시간을 골라 배추 모종을 심었다. 배추밭에 미리 퇴비를 넣어주지 못했다. 퇴비를 넣으면 약 1~2주가량 가스가 분출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데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날 오전에 참깨를 수확하고 바로 배추를 심어야 했기 때문이다.
봄에 심었던 참깨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고랑과 이랑을 만든 후 검은 비닐로 멀칭을 치고 배추와 무를 심었다. 부족한 양분은 비료로 충당할 작정이었다.
배추는 미리 모종을 내 심어야 하지만 무는 직파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무 같은 뿌리 채소는 모종을 내 옮겨 심으면 뿌리가 곧게 자라지 않고 구불구불 휘어져 자란다는 것이다. 무뿐 아니라 당근도 직파해야 하는 채소다.
지난해까지는 아버지가 심은 배추로 김장을 담았다. 아버지의 배추는 늘 알이 꽉 차고 튼실해 한 포기가 묵직했다. 그런 배추를 200포기 정도 심으셔서는 100포기쯤은 김장을 담고 나머지는 이웃에 나눠주곤 하셨다. 아버지가 배추를 가꾸는 수고는 전혀 몰랐다. 그냥 심기만 하면 저절로 크는 줄 알았다.
저절로 크기는커녕, 배추는 손이 꽤 가는 작물이었다. 배추를 심고 나서 첫 1~2주가 중요하다고 한다.
이때 벌레가 싹을 싹둑싹둑 뜯어먹으면 배추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만다. 배추가 어느 정도 자라 벌레를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벌레를 막아줘야 한다. 한랭사라는 모기장 같은 망을 씌워 벌레를 차단하는 방법, 벌레 약을 쳐서 벌레를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두루 쓰인다. 커피 찌꺼기를 뿌려두면 냄새 때문에 벌레가 오지 않는다는 민간요법도 있다.
배추를 심고 나서 아무 안전장치도 못 해주고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와야 했기에 출근하는 한 주간 배추의 안위가 매일 걱정이었다. 게다가 배추를 심고는 첫 일 주일은 물을 매일 주어야 배추가 시들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니 비 좀 내리라고 주문을 외워야 했다.
한 주 내내 유튜브에서 배추 키우기를 검색한 결과 배추에 가루 벌레 약을 치면 2주 정도 약효가 지속되기 때문에 한두 번만 쳐도 충분하다는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페트병과 스타킹으로 가루약 치는 도구 만드는 법도 배웠다.
이번 주말에는 배추 벌레약을 치러 내려가야 한다. 텃밭이 가까우면 얼마나 좋을까. 무덤에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 이북에서 내려와 강원도에 정착하셨다는데, 할아버지! 서울이나 경기도쯤에서 멈추시지 뭘 그리 멀리 내려가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