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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원 Oct 06. 2024

⑱앉으나 서나 배추 생각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해마다 우리 집 김장은 100 포기가 기본이었다. 배추 크기가 들쭉날쭉이었으니 아마도 포기로 치면 150 포기가 넘었을지도 모른다. 오빠네, 동생네, 우리 집까지 마음껏 챙겨가고도 김장 못 담는 사정이 있는 지인에게 줄 김치통까지 덤으로 몇 통 챙겨도 부족하지 않았다.

8월 5일 모종을 해 8월 31일 정식한 배추. 4주쯤 지나자 제법 배추꼴이 난다. 사진=김효원

김장하는 날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비장한 마음을 안고 시골 마당에 들어서면 그때부터 김장 전쟁이 시작됐다.


텃밭에서 배추를 뽑아 마당으로 옮기는 것이 첫째 일이다. 배추 몇 통을 양 옆구리에 끼고 텃밭과 마당을 몇 번 오갔을 뿐인데 이상하게 에너지가 방전되고 만다. 배추가 마당으로 저절로 굴러오게 하는 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싶지만 방대한 연구비와 개발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워 포기한다.


마당에 산처럼 쌓인 배추를 반 갈라 시든 잎을 정리하면 엄마가 그 옆에서 커다란 빨간 대야에 소금물을 녹여놓고 배추를 절이기 시작한다. 배추를 절이는 동안 속재료를 준비한다. 무를 씻어 채 썰기가 김장 전날 준비할 가장 큰 일이다. 채칼을 사용해도 나중에는 팔이 후들거린다. 마늘 다지기, 쪽파 까기도 미리 해놓아야 할 일이다.


김장 전날은 일찍 잠을 자야 한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배추를 씻어야 하므로. 그러나 김치 속 재료 준비가 끝나면 거의 자정이었다.


김장날은 해가 뜨기도 전 일어나 배추를 씻어야 한다. 날은 춥고 물은 차갑고 배추는 많고. 3중고를 견뎌야 하는 중노동이지만 수육을 먹을 생각을 하면 견딜만하다. 절임배추를 잘 씻어 물이 빠지도록 쌓아두고 속재료를 준비한다. 큰 통에 고춧가루, 식힌 밀가루풀, 멸치액젓, 새우젓, 다진 마늘, 매실액을 넣고 잘 섞는다. 여기에 무채, 쪽파, 갓을 넣고 버무려 김치 속을 만든다.


김치 속이 완성되면 7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자리에 앉아 속을 버무려 넣는 일은 수월한 편이다.


배추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가 될 줄 미리 알고(?) 20년 전 그렸던 배추 그림. 배추가 비싸진 김에 베란다에서 꺼내 거실에 걸었다. 그림=김효원

김장배추 모종을 내던 지난 8월 15일. 올해 김장을 몇 포기 할지 긴급 가족회의를 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김치 소비량도 줄었고, 작년 김장김치도 아직 남아있으니 각 집마다 김치통 2통 정도면 적당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24 포기 정도가 필요하다고 치고 넉넉하게 30 포기를 심기로 결정하고 모종을 냈다. 모종판에 배추 씨를 심으면서 동생과 나는 30 포기가 부족할 수 있으니 50 포기는 심어보자며 슬쩍 개수를 늘렸다.


시골집에서 심은 배추 모종판을 서울로 가지고 올라왔다. 모종판에 매일 물을 줘야 하는데 시골집에서는 물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서울집 베란다에서 매일 물을 줘가며 키운 배추 모종을 텃밭에 정식한 날은 8월 31일이었다. 모종판에서 실하게 자란 놈으로만 골라 심었더니 40 포기 정도가 됐다.


이상 고온으로 날이 너무 더워서인지 배추모종은 심자마자 시들시들해졌다. 뜨거운 햇빛을 가려보겠다며 풀을 뜯어 배추를 덮어주었다.


그 작고 여린 배추를 두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머릿속의 9할이 배추 생각으로 꽉 찼다. 배추 잘 있을까, 더워서 죽지는 않았을까, 벌레가 다 먹어치우지는 않았나.


일주일 후에 내려가보면 배추가 조금 자라 있었다. 벌레퇴치에 좋다고 해서 카페에서 커피찌꺼기를 얻어다 뿌려주기도 하고 배추벌레 약을 사다가 희석해 스프레이를 해줬다. 정식한 1~2주 후에는 비료를 주어야 한다고 해 비료도 한 숟가락씩 뿌려주었다.


심은지 2주쯤 되자 배추가 꼴을 갖췄고, 3주쯤 되자 싱싱한 푸른빛으로 자라났다. 5주쯤 되어서는 배추가 결구를 시작하려고 맨 안쪽 잎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결구가 될 때 벌레를 제대로 막아주는 게 중요하다. 결구된 안쪽에 벌레가 자리 잡으면 벌레가 배추 속을 모두 파먹어 못쓰는 배추가 된다.


배추를 심어놓고 나니 배추 한 포기에 1만 9000원 시대라는 뉴스가 여기저기 나오기 시작했다. 이상고온에 배추가 녹아내려 물량이 부족해졌다고 했다. 추석이 지나서도 고온이 계속돼 김장철 배추 수급에도 문제가 생길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평소 내 인생에 아무 존재감이 없었던 배추가 새삼 큰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신에게는 40 포기의 배추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온이 계속되면 배추가 사라지고 김치도 사라질 거라는 뉴스를 보며 친환경 생활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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