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효원 Oct 11. 2024

⑲아버지가 없는 1년(상)

아버지는 농부였다.


농부가 천직이었지만, 젊어서 자식들을 큰 물에서 공부시키겠다는 엄마에 떠밀려 시골 땅을 팔아 상경했다. 아버지가 서른 살에 낳은 딸인 내가 아홉 살에 서울에 왔으니 그때 아버지는 서른아홉 살이었구나 셈을 해본다. 기차를 타고 와 청량리역에 내려 역전에서 먹었던 짜장면의 맛과 냄새까지 기억이 난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전혀 새로운 삶 앞에 당도한 젊은 아버지가 이제야 안쓰럽다. 1970년대 시골에서 이장일을 하며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던 아버지가 서울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다가 번번이 사기를 당했다. 귀가 얇은 아버지(귀 얇은 건 4남매 중 나만 물려받았다)는 남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다.

엄마가 그린 아버지 초상. 사진=김효원

한 번은 아버지가 집에 늙수그레한 남자를 데려온 적이 있었다. 안방에 앉아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를 들으니 어린 마음에도 막 웃음이 나왔다. 그 남자는 주머니에서 마패(유원지에서 팔 법한 조악한 마패였다)를 꺼내더니 "우리 조상님이 어사 박문수 선생이었는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귀한 마패"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입을 벌릴 만큼 몰입해 듣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말발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이 남자는 아버지에게 "이 마패를 가지고 사업을 하면 엄청나게 큰돈을 벌 수 있다. 같이 하자"고 했고 아버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버지가 마패 사업에 투자해 얼마를 잃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말도 안 되는 사업을 한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와 불화하면서 어른이 됐다.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우리 집에 평화가 왔다. 아버지의 표정은 가방에서 꺼내놓은 토마토, 가지, 호박, 오이, 상추같이 유순해졌다. 오디철에는 오디를 따오셨고 다슬기를 잡아오거나 서리태를 가지고 오시기도 했다.


텃밭농사를 지어보면 알지만 여름 채소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이 쏟아져 미처 다 소비할 수가 없다. 우리는 아버지가 가져온 농산물의 고마움도 모르고 지청구를 했다.


"아버지, 농사를 줄여요. 이렇게 많이 하면 다 먹지도 못하고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데 냉장고가 꽉 차 더 넣을 데도 없어요. 힘들게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해요."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왔다가 하룻밤을 자기가 무섭게 시골로 내려가셨다. 더 계셨다 가시라고 붙잡아도 밭에 가봐야 한다면서 뿌리치셨다.


2023년 9월 4일 월요일 오전 9시. 여느 때처럼 출근해 후배들과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고향 오촌 아재가 전화를 하셨다.


"느이 아버지가 없어졌다. 자전거가 강가에 있는데 사람은 안 보여. 자전거에 이슬이 있는 게 어제 놔둔 거 같다. 어서 내려와 보야겠다."


119에 신고를 하고 서둘러 내려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강가에 모여있었다. 강가에는 아버지의 자전거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자전거는 아버지의 손발이었다. 100m 거리도 걸어가는 법이 없이 자전거를 타셨다. 자전거가 강가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자전거를 세워놓고 강을 건넜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농사짓는 강 건너 밭은 다리가 없어 바지를 걷고 물을 건너야 했다. 비라도 와서 물이 늘면 수위가 허리까지 왔다. 물살이 세 허리까지 물이 차면 건너기가 어렵다. 그런 때는 상류로 올라가 보를 건너뛰는 방식으로 건너셨다. 보는 가둬진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곳이 3곳 정도 있는데 물살이 급하게 흘러 발을 삐끗하면 물에 쓸려내려 갈 만큼 위험천만한 곳이다.

강 건너 밭으로 가기 위해서는 1m 가량 되는 보를 3~4개 뛰어 넘어야 한다. 사진=김효원

팔순이 넘은 아버지가 보를 위험하게 건너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자식의 마음은 늘 불안했다. 아버지에게 강 건너 땅은 이제 농사짓지 말자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땅을 놀릴 순 없다고 매번 건너다니셨다.


아버지를 말리지 못해 영월군청에 민원을 넣기도 했다. 팔순의 노인이 땅을 놀리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농사를 계속해야 하는데 강을 건너기가 위험하니 징검다리라도 놔주면 좋겠다고 읍소했다. 그러나 군청 공무원의 답변은 냉정했다. "징검다리를 놓으면 강의 흐름에 방해가 돼 안 된다, 지적도를 보니 돌아가는 길이 있으니 그 길로 돌아다녀라"라는 답이었다.


군청 공무원이 얘기한 길이란 마을을 2개도 더 지나 4륜구동 자동차만 들어갈 수 있는 험난한 비포장 도로 산길이다. 자동차도 없고 운전도 못하는 노인이 농사지으러 가기에는 말도 안 되게 멀고 험한 길이다. 그 길을 돌아가라고 하니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다.


어쩌면 예견된 사고였다. 강물에 휩쓸려 실종된 아버지를 119 소방대원 분들이 잠수해 반나절 넘게 수색해 찾아냈다. 자동차로도 5분 넘게 가야 하는 곳이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가족이 사망하면 경찰 조사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영월의료원에서 의사의 소견을 받고, 경찰 조사, 검찰 조사를 거쳐 ‘타살혐의 없음'을 받고서야 장례식장으로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른 후 가장 많이 울었던 시간은 아버지의 냉장고를 정리할 때였다. 아버지의 냉장고에는 돌아가시기 전날 동네분들과 짜장면을 드시고 남겨온 단무지가 들어있었다. 단무지 세 조각이 담긴 그릇을 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드신 음식은 짜장면이었다.



                    

이전 18화 ⑱앉으나 서나 배추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