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문학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꽤 많은 일기장을 남겼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날의 일을 몇 줄의 일기로 기록했다. 아버지 일기에는 농사 사이클이 비교적 상세히 적혀있다. 겨울에는 밭을 만들고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풀을 매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이 농사의 큰 틀이지만 지역에 따라 농작물의 파종과 추수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 아버지가 심은 날짜에 심고 추수한 날짜에 거두면 틀림없으리라.
아버지는 혼자 힘으로는 힘에 부칠만큼 많은 농사를 지었다. 채종포 옥수수 농사가 가장 컸고, 고추, 참깨, 들깨, 메밀, 배추, 무, 서리태, 고구마까지 골고루 심었다. 왜 그리 욕심을 부리시냐고, 이제 농사 욕심을 좀 내려놓으시라고 수없이 아버지를 타박했었다. 그 대답이 아버지의 일기에 있었다.
일자리를 나가서 하고서 담을 발라 보고서 내맞으로 건너가서 모래밭을 갈았는데 힘이 많이 들지만 하고 싶어서 땅의 애착심에서 나는 하고 있다. 바라는 것은 없다. (2020년 3월 19일 맑음)
날씨는 많이 더워서 일하는데 힘이 든 시기다. 그래도 하고 해야 할 흰콩을 산 밑의 밭을 갈고 심어야 해서 풀을 갈고 비료와 거름을 많이 해서 심었으니 잘 되겠지. (2020년 6월 10일 맑음)
감자 작업을 하고서 마주 캐고 콩을 심는데 비료를 놓고서 옆에다 심었다. 고구마 싹을 잘라다가 한 줄을 심어놓았다. 6月은 힘들게 한 달을 보낸 것이다. 너무나 일이 겹쳐서 이것을 지혜롭게 넘기느라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의 결실은 없고 지나가는 것이 지금의 시간이다. (2020년 6월 30일 맑음 소나기)
내맞밭을 가서 들깨 옥수수 콩 메밀들이 서로 앞다투어 자라는 것을 보면 나의 마음은 행복하다. 풀 한 포기라도 뽑고 싶어 진다. (2020년 8월 16일 맑음)
아침에 고추를 마당에 널고 부엌에 불을 때고서 내맞으로 물을 건너가서 밭을 들러가니 참깨, 들깨, 메밀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어서 마음의 즐거움이 생기었다. (2020년 8월 28일 맑음)
아버지는 땅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농사를 지었고, 작물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느꼈던 거였다. 내손으로 심은 생명이 커가는 것을 보는 행복은 올해 텃밭농사를 지으며 내가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땅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서 조금이라도 땅에 좋은 것을 주고 싶어지는 내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적이 없이 투박했던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일기장에 적어놓기도 했다. 매일 아버지의 일기를 조금씩 읽으며, 시골을 오가며 농사를 지으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를 가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집에 있으며 율무에 비료를 주고. 영준이가 와서 같이 있었다. 그러다 오후 8시에 올라갔다. 그래서 쓸쓸했다. (2020년 7월 31일 맑음)
앞밭을 갈고 손질을 하는데 서울서 아이들이 내려와서 같이 음식을 맛있게 먹고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많은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내가 예전에 알았다면 잘 살 수가 있었을 것을 몰라서 헛되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말았고나 하는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랬을까. (2020년 4월 10일 맑음)
일자리 하고 집안일을 보고서. 내맞밭으로 유박을 한포 지고 가서 아래 밭에 3포를 뿌리고 오디를 16K 주어가지고 와서 놓고서 송해씨의 죽음을 영화 엮에서 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인생은 허무하다. 왜서 삶을 위해서 끝없이 싸우며 해처 나가다가 아무것도 남김없이 가고 말까. 이것이 인생의 길이다. (2022년 6월 8일 맑음)
매일 아버지의 일기를 조금씩 읽으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주 편도 2시간 30분 거리 고향으로 내려가 텃밭 농사에 매달린 이유도 짐작하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아버지를, 농사꾼의 딸로서 애도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