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첫 둥근 보름달이 뜨는 날.
정월대보름을 즐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주 어릴 때를 기억해 보자니, 정월대보름은 설날이 지나고 얼마 있지 않아 뜬금없이 아침 식탁에 팥찹쌀밥이 올라온 날, 학교 급식에서 땅콩 몇 알을 챙겨 준 날. 정도로 추억한다.
TV에서는 정월대보름날 보름달이 밝게 떠 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본 것도 같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어렴풋이 배운 '내 더위'라는 말을 했던 것도 같고...
최소 3일 정도 쉬는 다른 명절과 달리 정월대보름은 쉬는 날이 없어 딱히 기대나 설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에게는 정월대보름에 다른 의미가 붙기 시작했다.
딱히 가족들이 정월대보름을 핑계로 모인 적은 없었다. 다만 그날은 웬일인지 친척 모두 할머니집에서 저녁 식사를 위해 모였다. 아마 토요일이 정월대보름이라 다 같이 금요일 저녁을 보내려 했던 것 같다.
할머니 집의 작은 방에는 오랫동안 중풍으로 누워계신 할아버지가 계셨다. 내가 기억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셨기에,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딱 그 정도다. 같이 산책을 해본 적도 다정히 밥상에 앉아 있어 본 적도 없다.
어쨌든 그날도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오리온 초코파이를 사들고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먼저 "아버지 저희 왔어요" 라며 인사했고, 나는 슈퍼에서 검정봉투에 담아 온 (우리 집은 당시에 조그만 슈퍼를 운영했다.) 초코파이를 꺼내며 "할아버지 안녕하세요"와 같은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중풍으로 말이 어눌한 할아버지는 허허 웃기만 하셨다. 연이어 도착하는 친척들도 우리처럼 할아버지 방에 가 이런 식의 인사를 건넸던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점점 어두워지니 사람들의 수다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고 나는 언니들과 한창 꿈나라에 접어들 때쯤이었다. 귓가에 아득하게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엄마와 큰 어머니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감춘 채 아이들에게 괜찮다며 잠든 우리를 다독였다.
정월대보름을 하루 앞둔 날, 온 가족이 모여 달을 보며 웃고 떠들었던 그 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미리 예상이라도 하셨던 걸까. 아직 날이 완연하게 풀리지 않아 손끝이 차가운 겨울과 봄의 사이.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모두가 한 마디씩 했다. "그래도 자식들 손주들까지 모두 보고 가시려고 그때까지 버티셨나 보다"라고. 모두와 인사를 하고 가셔서 다행이라고. 내내 고생하셨던 할머니는 후련하다는 말로 속마음을 감추셨다.
그 이후 우리 가족의 정월대보름은 자연스레 할아버지의 제삿날로 덮어졌다. 매년 밝은 달을 보며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고, 저녁을 먹으며 마무리한다.
남은 사람들과 이별을 준비하던 그날,
그 밤, 할아버지는 작은 방 창가에 쏟아져 내리는 달을 보며 어떤 마음을 실어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