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 오곡밥과 나물

by 수이

“아, 무슨 아침부터 술이야~”


아침, 이불에 파묻혀 눈도 뜨지 않은 내게 엄마가 작은 소주잔을 건네신다. 소주잔에 입술을 살짝 묻히고 미간을 잔뜩 찡그리면, 이내 엄마는 딱딱한 피땅콩을 쥐여주신다. 땅콩을 껍데기째 와사삭, 세 번 크게 소리가 나도록 깨문다. 옆에서는 아빠도 호두를 작은 망치로 두드리고 계신다.


귀밝이술 먹기, 부럼 깨기 완료.

“이거 다 미신이야~ 귀찮게 이런 거 왜 해.”
“어려운 것도 아닌데 하면 좋지. 우리나라 풍습이야. 1년 내내 좋은 소식 많이 듣고, 잔병치레 없이 잘 지내길 바라는 거지 뭘.”


아침 식탁에 앉았더니 오곡찰밥과 다양한 나물 반찬이 놓여 있다.
“언제 이거 다 만들었대?”
“아유, 어제 저녁에 다 했지. 금방 해. 많이들 먹어라~”


엄마, 아빠는 자식들이 한 해 동안 행여 조금이라도 아플까 봐 이런 수고쯤은 기꺼이 하셨다.
생색내지 않는 사랑을 먹고도, 그게 사랑인 줄 몰랐던 시절.




정월대보름이다.

사실 나는 새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너무 추운 겨울인데, 뭔가 새로운 시작을 할 만큼의 활기찬 기운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꺼운 옷을 입고 한없이 이불 속에 파묻혀 있고 싶은 계절. 그래서인지 ‘시작’을 하기에는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한 해의 진짜 시작은 5월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해가 시작된 후 처음 맞는 보름. 이것마저 나에게는 시큰둥했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내게 정월대보름은 그저, 할머니 드실 나물 반찬을 엄마가 많이 만들어 두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길고 멋진 접시에 투명한 무나물, 녹진한 고사리나물, 향긋한 건취나물이 의젓하게 자리 잡는다. 여기에 된장에 버무린 우거지 나물, 이름 모를 나물 하나가 더해진다.
하나하나 먹어 봐도 그 맛이 그 맛 같다.


이럴 땐 큰 국그릇을 꺼내 오곡찰밥과 나물을 넣고 고추장으로 쓱쓱 비빈다. 비빌 때는 숟가락보다 젓가락이 훨씬 제 역할을 한다. 밥알 하나하나 살아있도록 버무려 한 입 먹어보면, ‘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 나는 한국 사람이네.

이 비빔밥을 한 3일은 먹는다. 딱히 질리지도 않는, 슴슴하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인 맛. 어느 날은 계란 후라이를 올리고, 어느 날은 뜨끈한 된장찌개와 함께 먹는다. 같은 음식인데도 매번 조금씩 다르게 맛있다.




결혼을 한 후 이런 음식들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는다. 영유아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된 나는 아직 정월대보름 음식을 만들 만큼의 ‘주부 9단’은 아니다.


며칠 전, 아이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피땅콩과 호두를 보며 생각했다.
‘아, 이제는 내가 이런 것들을 챙겨야 하는 날이 왔구나.’

정월대보름 다음 날 아침, 아이들에게 피땅콩을 한 번 깨물어 보라고 권했다. ‘콰삭’ 소리를 내며 재밌다는 듯 웃는 다섯 살과 세 살. 내년에는 나물 반찬도 조금 만들어 줘야겠다. 물론 맛없다고 하겠지만.


이런 세시풍속이 별것 아니라고, 다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부정적인 말은 그냥 내버려 둔다.


미신이면 뭐 어떤가.
정월대보름 덕분에 사흘은 반찬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정월대보름 덕분에 올 한 해 액땜 다 했는데.

이것도 다 K-푸드고, K-컬처다 이거야.



지난 금요일(3월 6일) 발행 예정이었던 글입니다. 조금 늦게 올린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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