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음식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다. 엄마들은 이상하게 제철을 잘 안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엄마는 제철 재료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봄 : 냉이, 달래
식탁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건 역시 냉이와 달래다. 겉보기에는 흙이 잔뜩 묻은 잡초 같은 냉이의 외형. 뿌리에 붙은 흙을 깨끗이 씻어 칼로 살살 손질하고 떡잎은 떼어내 한입 크기로 잘라 놓는다. 쌀뜨물에 된장을 크게 두 큰 술 넣고 바르르 끓어오르면 알맞게 썬 감자와 두부, 애호박을 넣고 다진 마늘도 조금 더한다. 매콤하게 먹고 싶으면 청양고춧가루를 살짝, 먹기 직전 냉이를 넣고 3분 정도 더 끓이면 완성.
향긋한 산내음이 담긴 냉이된장찌개는 순식간에 나를 시골 어느 집 부엌으로 데려다 놓는다. 구수한 국물과 살캉한 두부, 구불한 냉이를 숟가락에 가득 담아 입에 넣으면 ‘아, 이제 겨울 끝이다’ 싶은 흐뭇한 웃음이 난다. 어느 고기반찬도 부럽지 않은 냉이된장찌개. 봄이 끝난 뒤에도 먹고 싶어 소분해 둔 냉이는 냉동실에 모셔 둔다.
달래는 또 어떤가. 엄마는 양념간장에 달래를 넣어 달래장을 만들어 두셨다. 마른 곱창김을 팬에 살짝 굽고 갓 지은 밥도 준비 완료. 여기에 알싸한 달래장을 넣어 싸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오죽하면 식사 시간도 아닌데 거실로 가다 말고 식탁 앞에서 김에 밥과 달래장을 얹어 하나씩 싸 먹었을까. 그만큼 중독적인 달래김밥이었다.
여름 : 오이미역냉국
여름에는 역시 수분 보충이 관건이다. 각 집마다 에어컨이라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떡하니 있지만, 땀을 많이 흘리는 만큼 시원하면서도 상큼한 음식이 당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친구들과 동네에서 힘차게 뛰어놀다 집에 들어오면, 식탁엔 오이미역냉국이 놓여 있었다. 오이를 얇게 썰어 불린 미역과 함께 준비해 놓고, 큰 유리볼에(꼭 유리볼이어야 한다) 물, 식초, 설탕을 넣어 새콤달콤한 국물을 만든다. 오이와 미역을 넣어 잘 섞은 뒤 냉장실로 직행. 먹기 직전 각얼음을 동동 띄워 한 숟갈 들이키면 하루의 갈증이 싹 씻긴다.
가을 : 정구지전
추석 즈음이 되면 묘하게 날씨가 바뀐다. 날카롭던 햇빛이 둥그스름해지고, 동네 골목에는 은은한 기름 냄새가 흐른다. 아마도 전 부치는 냄새일 것이다. 그 냄새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풍요롭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황금빛 논이 가을바람에 출렁이고 따사로운 볕이 거실을 물들이면 우리 집에서도 정구지전을 부쳐 먹었다. 정구지는 부추의 경상도 방언인데, 할머니가 경상도 출신인 탓에 나는 ‘부추전’이 아니라 늘 ‘정구지전’을 먹고 자랐다.
키 큰 잔디처럼 생긴 부추를 착착 썰어 물, 계란, 밀가루를 넣고 반죽을 만든다. 엄마는 몸에 좋다며 밀가루 대신 메밀가루를 넣기도 했다. 넉넉히 두른 기름과 정구지전 반죽이 만나는 순간, '치익-' 소리가 나며 입에 침이 벌써 고인다. 얇고 넓게 쭉쭉 펼친 반죽은 윗면이 살짝 건조해졌을 무렵 휙 뒤집는다. 노릇하게 구워진 전 색깔이 황금빛 논의 그것과 같다. 가을과 닮은 정구지전!
접시에 담은 정구기전은 젓가락으로 쭉쭉 찢어 초장에 콕 찍어 먹는다.
겨울 : 김치국밥
겨울의 아침은 더 어둡고 더 춥다. 그래도 학생이라면 응당 등교해야 하는 것. 시큼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메운다. 이 냄새에 깬 고등학생인 나는 시계의 잔소리를 들으며 일단 일어나 세수를 한다.
자식들 아침은 꼭 먹이고 싶었던 우리 엄마는 뜨끈한 김치국밥을 식탁에 만들어 놓으셨다. 감칠맛 나는 멸치 육수에 밥, 김치, 콩나물을 넣고 30분 정도 끓이면 완성되는 김치국밥. 오래 끓이니 밥이 퍼지면서 국물이 걸쭉해지는데, 죽이 되기 직전의 질감이 되면 딱 좋다.
아삭거리는 김치와 콩나물, 뜨끈한 국물, 든든한 밥이 어우러져 등굣길이 춥지 않았다. 핫팩을 뱃속에 두둑이 장전한 기분. 그 든든함은 하루 종일 추운 날씨 속에서도 방전되지 않게 나를 지켜줬다.
계절이 바뀌면 반드시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다. 그 음식들로 나는 시간의 흐름을 체감한다.
그리고 엄마들은 이상하게 제철을 잘 안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식탁 위에서 계절을 먼저 꺼내 놓는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나만의 음식이 있나요? 어떤 건지 댓글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