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으누 Apr 02. 2024

17. 어느 종례

  3월은 죽음의 달. 학교 나이스 초기 세팅, 학급 기틀잡기, 학기초 상담, 학교 교육과정 설명회, 바뀐 평가계획표 작성을 모두 해치우고 잠시 여유가 생겼다. 물론 당장 다음날부터 진단평가, 특수교육 연수, 현직 연구원 협의회 등등이 남아있다.


  교무실에서 가장 따뜻한 히터 옆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데 반 아이 두 명이 온다. 7교시가 끝나고 종례를 받으러 온 것이겠지. 항상 세상 떠나가라 씩씩한 목소리로 “선생~~님~~~! 종례~~ 해주세요~~! 빨리! 빨리!” 이러는데 오늘은 웬걸, 누가 들을까 속삭이는 어조로 나를 부른다. 몸짓은 모두가 볼 수 있게 크게크게 들어오면서.


  괜히 장난기가 들어 “뭐야~ 왜이렇게 급해? 잉~ 안 할래~~” 라고 했더니 한 녀석의 입이 댓발 나온다. 뭐야, 해보자는 거냐! 과장되게 상처받은 목소리로 ”지금 선생님한테 입 내미는거야~?~?“ 라고 놀렸더니 쭉 나온 입으로 뽀뽀를 날린다. 정말 유쾌하고 맑은 애교다. 그제서야 ‘얼른 가자!’는 말과 함께 종례를 하러 반으로 출발했다.


  우리 반의 종례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먼지 한 톨 남지 않게 반을 뽀득뽀득 청소하기(놀랍게도 정말 빛이 난다. 칠판도, 아이들 책상도, 교탁도, 사물함도.) 두 번째, 종례 담당이 교무실에 와서 종례 요청하기. 세 번째, 종례 담당이 먼저 교실에 가서 반 친구들을 모두 가지런하게 앉혀둔다. 네 번째, 선생님이 전달 사항(보통 가정통신문)을 전달한다. 다섯 번째, 외투입고, 가방 메고 일어나기-차렷-공수-인사(가장 까다로운 단계. 단계마다 행동이 통일되어있지 않으면 차렷으로 돌아간다.)를 한다. 그러면 드디어 대망의 종례가 끝이난다.


  작년 한 해 3학년을 데리고 위의 다섯 단계를 혹독하게(?) 실행했던 것이 전교에 소문이 쫙 나서 그런지, 올해 반 아이들이 순해서 그런지 모든 단계가 반 아이들에게 물흐르듯 체화되었다. 덕분에 모든 단계가 착착착 이루어져서 선생님은 행복하고 학생들은 종례때마다 칭찬을 받으니 항상 신나는 상태.


  종례를 하러 교실앞으로 가는데 3학년의 g가 내 담당 교실앞으로 먼저 도착했다.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뒤를 밟으니 g가 “다들 다 했냐~!”라며 선배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다. 평소에도 까불거리고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몸집 큰 형아인데, 나는 녀석의 1학년때 모습을 기억하니 그저 웃음이 났다.


“뭐해.”

“악!”

  놀란 표정으로 복도 구석으로 가는 녀석.

“뭐하냐구.”

“어, 그, 종례하려구요.”


  내 반 종례를 왜 네가 해. 어이가 없어서 서로 웃음을 참다가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오늘 종례는 네가 해봐. 반 아이들에게 나눠주려던 가정통신문을 3학년 녀석에게 건넸다.


 “그래, 오늘 2학년 종례는 g가 하는 걸로. 이거 나눠주고 종례시켜.“


  옙, 하더니 신난 표정으로 들어가는 g. 2학년들도 웃는다. 왜 네가 종례하러 들어와. 나는 문가에 서서 녀석이 하는 걸 지켜본다.

 

 “이거 집에 가져가서 부모님하고 같이 봐~! 잃어버리지 마라!”


  뭐야. 꽤 하네. 2학년들이 가정통신문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는데, g가 괜히 바닥을 손가락으로 슥 닦아보더니


  “어~? 이 먼지 뭐야~?”


  다같이 웃는다. 작년, 청소를 허술히 하는 3학년에게 괜히 꼬투리 잡는답시고 했던 말을 그대로 배웠다. ‘그거 오빠 때야!’ 2학년에 있는 g의 동생이 반박하고, 또 다같이 웃는다.


  “이제 인사시켜야지.”


  반 아이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꼬물꼬물 옷을 입는다. 두 명 정도가 행동이 느리다. 아 빨리 하라고~! 반 아이들의 원성.


  “가서 선배의 위엄을 보여주고 와.”

 “옙.”


  뭘 하려나. g가 성큼성큼 가서 채 외투를 덜 입은 녀석의 외투를 여며 준다. 선배가 다가오니 순간 두려워하던 녀석의 표정이 뻥 찐다. 아, 선배답네. 좋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인사의 순간. 다 일어선 반 아이들이 일제히 g를 쳐다본다. 초롱초롱한 눈빛 공격을 받은 g는 다급하게 외친다.


  “어어어.... 나, 나 말고 선생님 보고 인사드려야지!”


  뭐야. 예의까지 바르다고? 피식 웃음을 흘리며 교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차렷~ 공수~ 인사~!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그제서야 2학년 교실에서 풀려난 g. 야, 고생했다. 이제 너도 종례 받으러 가면 되겠다.

이전 17화 16. 가끔, 어쩌면 자주 비겁해지기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