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으누 Apr 09. 2024

18. 애틋함도 타이밍

  별 탈 없이 지낸 기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작년의 나는 의젓하고 차분했던 3학년의 담임을 영원히 담당할 것처럼 행복해했는데 녀석들은 어느샌가 이미 졸업을 하고 없다. 각각의 녀석들의 이름만이 남아 마치 고대 시대의 유물마냥 가끔 희미하게 언급된다.


  3월, 학기 초. 이전 년도와는 다른 삶에 적응을 하는데 혼자 자꾸 삐걱거린다. 교실 문을 열면 ‘맥아리’가 하나도 없는 녀석들이 눈동자만 슥 옮겨 나를 바라볼 것같은데, 교실 문 끝을 잡자마자 “안녕!!!! 하세요!!!! 국어쌤!!!!!!!!!!” 소리가 교실 문을 뚫고 한 층 아래의 교무실까지 가 닿을듯 터져나온다.


  어, 어어어... 그래. 오늘도 활기차구나. 올해의 2학년 친구들은 애교 넘치고, 에너지 넘치고, 과자가 넘치고, 정도 넘치고, 아무튼 성적 빼고는 뭐든 다 넘치는 녀석들이다. 뭐든 구획에 맞춰 딱 딱 정돈된 것에 안정을 느끼는 나와는 정 반대. 자신들의 활기찬 인사에 기가 질려 눈을 질끈 감고 입꼬리는 희미하게 말아올리며 고개를 메트로놈마냥 일정하게 서너번 끄덕인다. 그걸 보는 게 녀석들의 흥미 포인트라도 자극했는지 나의 질문 하나 하나에 더, 더 크게 대답한다. 심지어 춤을 추면서 대답한다.


  2학년의 웃음 가득, 행복 가득한 종례 시간을 복도에사 구경하던 올해 3학년 녀석이 확인하듯 물어본다.


“선생님, 작년 3학년이 그리운 표정이시군요.”


  어, 잘 알고 있구나.


  세상에 대한 냉소와 호기심, 극강의 효율성과 쓸데없는 것에 대한 즐거움, 철두철미한 논리와 실없음, 힘없음과 내적 흥겨움. 그 부조화가 나를 구성하는 이중성이었고 작년 3학년 녀석들은 그런 나와 잘 통했다.


  슬프게 처진 눈을 끔뻑이다가 조용히 릴스의 노래를 읊조리며 춤을 추던 1호, 매사 똑부러져 보이지만 다시 보면 허당이던 2호, 수줍고 온순해 보이지만 축제 때 맨 가운데에서 자신의 춤을 자신있게 뽐내던 3호, 어두워 보이지만 내심 가장 다정했던 4호. 보기만해도 행정 업무의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구성이었다.


  서로 서로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좋다고 합의되어 “우리반 컨셉은 콩가루야.” 라고 농담 삼아 말하던 시간들. 적당히 친밀하고 적당히 선을 지키던 그런 담백한 관계. 아, 그래. 녀석들을 보는 하루 하루가 가는게 아까울만큼 이만큼 나와 잘 맞는 성향의 담임반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그립지.


  하지만 시절 인연이라고, 모든 관계가 어떤 한 때의 밀도로 영원할 수는 없다. 작년 한 해 적당히 잘 지냈으면 그걸로 된 거고, 고등학교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가며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내가 녀석들에게 바라던 바였다.


  당장 올해, 간만에 나에게 연락을 한 2호도 고등학교 생활이 매우 즐겁다고 했다. 학교가 크니 다양한 학생이 많고,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인문계 고등학교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고, 자신과 성향이 맞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내내 나 또한 즐거웠다. 잘 커나가고 있구나.


  동시에 이것이 교사의 구성요소 중의 하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 학생들은 커나가고. 짧게는 1년, 아무리 길어도 한 사람의 인생 중 3년 정도만을 스쳐지나가듯 볼 수 있다. 지금 당장 이 녀석들과 평생 볼 것처럼 지독하게 엮여도 나는 한 사람의 인생 중에서 청소년기의 기억에 잠깐 머무르는 사람인 거구나.


  개인적인 ‘나’의 성향으로는 타인과의 관계에 큰 가치를 두지 못해서 몰랐는데, 학생들과의 관계를 곱씹다보니 이런게 ’시원 섭섭’하다는 느낌인 건가 싶었다. 1년을 별 탈 없이 지내다 고등학교에 올려보냈으니 시원하다가도 친밀감을 형성했던 녀석들이었으니 섭섭하고.


  마치 ‘첫사랑을 가슴에 묻는’ 사람마냥 잠시 애틋해하다가 내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녀석들도 나를 담임이라고 보면서 나에게 가장 의지를 할텐데. 나도 이 녀석들에게 적응을 해야지. 그리고 또 1년을 즐겁게 지내봐야지. 어쨌든 올해의 분위기에 맞춰 종례를 한다. 그런데 우리반 녀석이 집에 가려고 교실 문을 나서며 말한다.


“아! 1호 오빠랑 3호 언니랑 저번주 금요일에 우리 학교 왔어요! 선생님 찾았는데 안계셔서 아쉬워했어요. 3호 언니는 선생님 보고싶은데 없다고 막 울먹거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같이 놀아줬어요. 잘했죠. ”


  아잇. 애틋함도 타이밍인가. 서로 안 맞네.

이전 18화 17. 어느 종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