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성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물 온도 괜찮으세요?"
이젠 듣기만 해도 '무릉도원' 드립이 절로 떠오르는. 미용실의 단골 멘트다. 거처가 바뀔 때마다 마트 다음으로 꼭 찾아내야 하는 가게, 미용실. 나는 옷 욕심이 없다. 메이크업 제품도 쓰던 것 위주로 쓰고, 일 년에 한두 번 색조 화장품 사는 게 다니까, 뷰티에 크게 관심 많은 편이라 할 순 없을 터다. 그런 내가 딱 한 가지. 가만 못 두는 것이 있다면, 바로 헤어다.
나는 다양한 버전의 내 모습 보는 걸 좋아한다. 내면이 중요한 것일 테지만, 그건 보이지 않으니까. 바로 티 나는 외모를 건드리는 거다. 헤어 변화만큼 눈에 띄는 것도 없다. 남들한테 얻어지는 관심은 보너스고! 또,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그 느낌에 따라 옷도 조금씩 다르게 입는데, 그러다 보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는 나인 채 똑같은 사람이지만 겉으로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순간들을 사는 게 좋다.
"쟈는 와 머리로 지랄이고.(저 아이는 왜 머리를 가만 못 둬 난리법석이니?)"
주로 말 잘 듣는 딸 포지션인 내가 엄마 속을 썩인 것도 헤어스타일 때문이었다. 솔직히 반삭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금발 숏컷인 채 본가에 갔을 때, 엄마는 이른 저녁부터 강소주를 들이켜셨다. 곁들인 안주는 오열뿐이었다. 나는 인생에 손꼽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스타일이라 꽤 오래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렇게까지 다이내믹한 반응을 보이실 줄 몰랐으니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머리카락은 금방 자란다', 그리고 '그저 머리카락일 뿐이다. 왜 그렇게까지 슬퍼하느냐' 하셨고, 나에게는 "얼른 머리 바꾼다고 해!" 윽박지르는 척하셨다. 나는 우는 어머니를 달래면서도, 끝끝내 다음 날 동네 미용실에 끌고 가겠다는 말에는 단호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놀랍게도 열일곱이 아니라 30대의 일이었다.
머리카락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게, 엄마. 하지만 어머니는 '어떻게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어주냐'라고, '네가 아이돌 가수도 아닌데 왜 그렇게 유난이냐'며 '내 딸이 바뀐 것 같다' 하셨고, 실제로 딸을 잃은 것처럼 새벽까지 눈물을 흘리셨다. 그저 머리카락일 뿐인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까지. 나는 또 나대로 왜 이렇게까지?
난 너의 긴 머리 때문에 너를 좋아했는데.
- 자두, '대화가 필요해' 중
헤어진 애인도 아니고, 어머니가 내게 바라는 헤어스타일은 갈색 긴 머리에 앞머리 있는 스타일이다. 그게 가장 여성스럽고, 얼굴을 갸름하게 해 주기 때문이라 하신다. 반면 어머니의 헤어스타일은 아주 짧은 생머리다. 염색은 새치염색 정도만 하셨는데, 내가 하도 다양하게 염색하는 걸 보시곤 가끔 붉은 기가 나게 염색하거나 조금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실 때도 있다. 하지만 절대, 절대 긴 머리를 하진 않는다.
"나이 든 여자가 긴 머리 하면 보기 싫다."
실제로 미디어에서 그런 배우를 보면 징그럽다고 비난하신다. 어머니는 연령별로 어떤 머리 모양을 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다고 어릴 적에 긴 머리를 하셨느냐? 그것도 아니다. 오래된 사진 속 어머니는 한결 같이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헤어스타일이다. 비슷한 스타일을 몇십 년째 고수하시는 입장에서는 볶았다가 폈다가 보라색, 빨간색, 핑크색 물들였다가 귀 밑까지 잘랐다가 허리까지 기르곤 하는 내가 유별나 보일 수 있었겠다 싶다.
최근에 미용실을 더 자주 가고 있다. 염색하면 그게 문제다. 뿌리가 자라면 소위 '뚜껑'이 생겨서 신경 쓰이거든. 뿌리 염색은 두 달에 한 번하면 되는데, 앞머리까지 만든 바람에 더 자주 방문하고 있다. 어플로 예약해 주로 오전에 방문한다. 지정 선생님과 어떤 스타일을 할 건지 상의한다. 어릴 땐 명확히 원하는 스타일이 있었다. 이를 테면, 티아라 은정 숏컷, 치인트 홍설 히피펌.. 한데 요즘엔 그런 거 없다. 오롯이 선생님을 믿고 "그냥 깔끔하게 해 주세요."다.
헌데 이번엔 원하는 스타일이 있었다. '서울 체크인'에 나온 이효리 님! 밝은 갈색에 뜨문뜨문 하이라이트 컬러가 있다. 여름에 어울리는 톤업 컬러. 원래 내 머리도 갈색이라 시도해보기 좋을 것 같았다. 너무 얌전해서 슬슬 눈에 띄는 스타일해보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머리를 감고 거울 앞에 섰는데, 톤 업이 아니라 톤다운되어 있었다..
여름이라고 남들 다 톤 업 할 때 혼자 톤 다운하는 사람 어때...? 머리카락 말려놓고 보니 또 마음에 안 들진 않아서 조용히 나왔다. 애초에 이효리 님 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헤어 시도해보는 게 목적이라. 그 머리는 또 다음에 하면 되지! 이상 없음! 다만, 최근에 산 핫핑크 카디건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 핑계로 옷 한두 벌 더 사야 할 것 같다. 머리를 열심히 감으면 탈색한 부분이 밝아진다고 한다! 부지런히 감아야지. 염색이 빠지면 또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한때는 머리카락에 정체성이 있다고 믿은 때도 있다. 긴 머리가 아니라 짧은 머리일 때 더 '나다움'이 느껴진다고 생각한 적도. 그렇지만 그저 머리카락일 뿐. 머리카락이 아니라 헤어스타일을 자주 바꾸고, 그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이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나다움'에 가깝다고 새로 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