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벌레 쓴 글

#천왕성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by 에고고 프로젝트

한동안 우울했다. 그래, 정확히는 7월이 되자마자 기운이 빠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 무렵쯤 내게 생긴 변화라곤 '누군가 진지하게 만날 생각 말고 그저 새로운 사람들 다양하게 만나보자', '내년에 결혼은 무슨' 이런 다짐 아닌 다짐뿐이었다. 놀랍게도 그 이후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지나간 연인에 대한 감정을 회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사람에 대한 감정뿐 아니라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회수한 것이 문제였다. 밥도 잘 먹고, 잠도 8시간씩 잘만 자서 무기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나는 일상의 무기력이 아니라 '관계'의 무기력에 빠져버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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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는 1순위를 내버리자고 다짐한 셈이었다. 1순위? 웹툰 원작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유미의 세포가 순위를 조정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과거에는 연인 '구웅'이 1위였던 유미가 회를 거듭할수록 본인이 되었다가, 새 연인 '바비'가 되었다가 또 자신의 직업인 '글'이 되기도 한다. 그럼 나는 생각한다. 내게 1순위는 무엇이지? 사랑. 사랑이지만 확실한 건 존재적 사랑은 아니다. 그러니까 '구웅' 혹은 '바비' 같은 한 사람으로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한다는 감각. 사랑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내가 마음 쏟아 하루를 살아갈 '사랑'이라는 감각이 있느냐. 그것이 1순위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로맨스적인 사랑만 있진 않지. 친우와 동료, 가족 모두를 다양한 형태로 사랑한다. 좋아하는 수필, 소설, 드라마, 영화...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명확하게 로맨스. 로맨스적인 사랑이 내게 1순위다. 그건 내 가치관, 신념보다 앞서고 꿈, 진로에 대한 욕심도 쉽게 제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아웃도 왔다. 글쎄, 한창 바쁠 때에 비하면 그렇게 야근을 하는 편도 아니어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처럼 일에 매몰되어 있지도 않고, 퇴근과 동시에 일에 대한 생각 전구도 달칵 꺼버리니까. 번아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었다. 한데 최근 무턱대고 별 일도 아닌 것에 짜증이 왈칵 쏟아졌고, 기억도 안 나는 불편함들이 생겼다. 우연히 번아웃 체크리스트를 보았고, 상당히 많은 항목에 체크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꼭 잠잘 시간 없이 바빠야만 번아웃이 오는 건 아닐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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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지금 이렇게 사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런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취준생 때의 나는 '어영부영'이라는 단어를 사랑하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이렇게 어영부영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 어떡하지. 어영부영 남들 사는 대로 혹은 그보다 못하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불안했다. 비슷한 키워드 같지만, 요즘의 나를 계속하여 괴롭히는 단어는 '얼레벌레'다. 얼레벌레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되는 대로. mbti J 답게,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삶에도 계획을 세워 그를 위해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지각하지 않을 정도로만 일어나서 정도껏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을 만큼 몰두해 일하고, 시간을 내 여러 그룹의 지인들을 만나 커피와 술을 마셔 재낀다. 이렇게 얼레벌레 살아도 되는 걸까? 조금 더 삶의 고삐를 꽉 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쓰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든다. 어떻게든 얼레벌레 해내는 것도 능력 아닐까? 어쩌면 행운일지도. 그럭저럭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무엇이 불안한가? 당장 굶을 일도 억장이 무너져 내릴 슬픈 사건이 있지도 않은데. 그리고 애초부터 거창한 계획을 갖고 살지도 않았다. 순간순간 하고 싶은 활동에 집중해서 살았던 것이 결국 한데 모여 예상하지 못한 좋은 결과를 낳았다. 나는 그런 흐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지금 얼레벌레 산다고 너무 기죽지 말아야지. 얼레벌레 살면서 얼레벌레 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번아웃이 온 거겠지. 프라이팬에 내용물도 없는데 불만 강하게 켜 두면 프라이팬부터 집 전체까지 태우고 만다. 오늘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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