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볼 결심

#천왕성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by 에고고 프로젝트

"솔직히 그분 인상이 정말 별로였어."

복숭아를 서걱서걱 베어 물며 친구가 말했다. 놀라운 말이었다. 작년 연말쯤, 친구에게 애인을 보여준 일이 있었다. 내게 그날은 무지 설레고 좋은 기억으로만 남았는데. 그때 당시 티는 내지 못했지만, 친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어떤 식으로 별로였느냐 물으니, 그저 뭐라 표현 못하겠지만, 나를 고생시킬 것 같아 불안했다고 답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결혼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물론 그랬어도 말리지 못했겠지만.."


맞는 말이었다. 난 말려짐은 고사하고, 내 행복에 재를 뿌린다고까지 생각했을 터였다. 그 정도로 나는 그에게 너무, 그 관계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


친구가 그 말을 어렵사리 꺼낸 건, 내 발언 때문이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가여워했다고. 짠한 마음이 있어 언제든 그에게서 연락을 받으면 태풍 앞 작은 나뭇잎처럼 여지없이 흔들리고 말았을 거라고. 한데 우연한 계기로 달라졌고 지금은 길에서 마주쳤을 때 주먹 안 나가면 다행이라는 말.


나는 짐짓 우스꽝스럽게 펀치 날리는 복싱선수처럼 제스처를 취했다. 친구는 웃으면서도 다행이라는 속내를 애써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친구 말은 옳았다. 나는 그와 혼인 약조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으로 인해 한동안 고생했다. 마음고생. 아무도 안 건드렸는데 혼자 곪은 상처를 긁고 또 긁어서 두 계절을 아파했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분노가 이틀 정도로 짧게 끝났다. 내 마음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했다. 이제 그의 홈그라운드에서도 아무 생각하지 않게 됐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티키틱'의 '청소' 노래 가사처럼, 청소가 곧 끝나간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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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남을 결심했다. 만남, 만남은 언제나 내게 '결심'이다. 언젠가 SNS툰에서 본 말이기도 하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고, 그걸 평생 지켜내는 것이다.
@hadahada.drawing


내가 맞이한 것도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는 아니었지만, 소소한 일상을 나누게 된 이였다. 퇴근 후 인상 깊게 본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동네 하천가를 함께 뛰고,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씩 나눠 마시는 사람. 멍이 잘 든다는 말에 온갖 연고와 영양제를 안겨주는 사람. 그늘은 뒤로 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 볼 용기가 생겼다. 영화 대사처럼 누군가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만난 것은 아니고. 조금 더 충만해지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만나 볼 결심'을 했다.


하지만 결심과는 다르게 어떤 날은 충만하다가도 어떤 날은 쉽게 포기하고 싶어 진다. 괜한 짓을 한 것 아닌가 하는 마음까지 든다. 혼례를 치른 것도 아닌데, 왜? 싶지만. 이 정도의 마음으로 시작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정도 만났을 때까지 이 정도 마음에 그친 적도 없어서. 아마 조금 더 내 마음을 지켜봐야 할 테다. 그렇지만 다짐한다. 결심했으니 너무나 쉽게 놓아버리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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