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는 권력

#천왕성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by 에고고 프로젝트

나는 키가 크지 않다. 어디에선가 평균이라 들은 것도 같다. 어릴 땐 체육시간에 키 순서로 번호를 붙였다. 나는 5번에서 7번 사이를 주로 담당했다. 특별히 내 정체성 안에 '키가 작다'는 없는데, 생각해보면 결혼식에서 사진을 찍을 때 "키 작은 여성분들, 앞에 서세요!" 할 때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굳이 따지면 '평균이지만 흔한 확률로 작은 편'에 가깝겠다.


그런 평균의 키 역시 상대적인 것이어서, 대중교통에서 나보다 작은 사람을 만나면 어쩐지 우쭐해지고, 나보다 큰 사람 옆에 서 있으면 어쩐지 기가 죽었다. 한 2cm만 더 크고 싶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편한 건 곧 죽어도 싫어서 굽이 높은 구두는 전혀 신지 않는다. 운동화가 최고지. 키에 대한 욕심은 없다.


엊그제 SNS에서 '남자 친구 시야에서 보이는 나'라는 주제의 짧은 영상을 봤다. 남자 친구 눈높이에 휴대폰을 가져다 대고 본인을 촬영한 영상이었다. 여자 친구가 내려다보이는데, 꺄 이렇게 귀엽다고? 같은 느낌의 영상이었다. 나도 그걸 보며 촬영자가 귀여워 미소 지었다. 누군가의 시선이라는 거, 본 적 없으니 궁금한 거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애인이 날 어떻게 보는지 알게 되면 설렐 법도 하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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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느지막한 오후. 애인 집에서 눈을 떴다. 넓은 통창 앞에 앉아 애인이 타 준 따뜻한 커피를 호호 불며 밖을 구경했다. 10층이 훌쩍 넘는 곳이기에 내려다 보이는 모든 것이 아기자기했다. 나무들은 모두 심즈 같은 게임에서 만들어 둔 것 같았고, 도로는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거리의 악사가 색깔 분필로 그려 넣은 것 같았다. 자동차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레이스 장난감 차 같아 보인다는 건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보다 더 잘 설명하는 표현은 없을 터. 티브이 보듯 창밖을 본다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한참을 구경했다.


비가 쏟아지니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우산을 펼쳐 들었다. 누군가는 우산이 없었는지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성큼성큼 걸었다. 저들은 내가 이렇게 관찰하고 있는 거 모르겠지. 왠지 흥미롭긴 하지만 너무 실례인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턴 차가 다니는 도로로 시선을 옮겼다. 도로에 똑같이 30 30 30이라고 적혀있는데, 어떤 도로의 30은 거의 다 닳아 흐릿했고, 어떤 30은 선명했다. 저쪽으로 가는 차량이 훨씬 많은 걸까?


재빠른 오토바이 한 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형광 연두색 조끼를 입고 멋지게 주차한 뒤 가게를 향해 걸었다. 형광 연두색 조끼를 포착하고 나니, 모든 배달 기사에게 그 색이 보였다. 10명 중 9명은 형광 연두였다. 이렇게 위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니까. 안전은 하겠다. 위아래 모두 검정으로 입은 기사가 괜히 걱정됐다. 지금 멋진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커피 한 잔 더 마실래?"

"응!"


바로 고개를 꺾어 머그잔을 내밀었다.



지난주. 빗소리가 징그러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비는 땅의 상황 같은 것은 조금도 고려해주지 않고 내렸다. 물은 가장 낮은 곳부터 채웠다. 흐르는 물은 흐르고 흘러 아래로 향했고, 발목, 무릎.. 한층 한층 겁도 없이 추격해 올랐다. 그 때문에 누군가는 재산을 잃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퇴근길. 이게 내가 매일 타던 버스인지 관광지의 수륙 양행 버스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내렸다. 다른 차선의 자동차 바퀴에 파도에 밀려와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바다가 아니라도 파도가 일 수 있구나.


하늘을 봤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높은 건물. 높았다. 비가 아무리 많이 온들 물이 저기까지 찰 순 없었다. 그 창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어떨지 생각했다. 물이 고이고, 심지어는 흐르는 상황이 경계는 될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어쩌면 위치도 사람을 만들지도. 하늘을 가로막고 선 스카이스크래퍼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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