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성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평일의 중심. 수요일에 연차를 냈다. 1월, 백신으로 인해 얻은 이틀의 공가를 제외하곤 올해의 첫 연차였다. 사실 충동적이었다. 트위터에서 우연히 본 게시글 하나 때문에 덜컥 내버렸으니까.
겨우내 닫혀있던 궁궐의 창과 문을 열어, 봄날 햇살과 바람을 불러들입니다.
- 문화재청(@chlove_u)
창덕궁 궐내각사, 희정당, 대조전, 낙선재의 창과 문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일자는 단 3일. 모두 평일이었다.
이럴 때 쓰라고 휴가가 있는 거 아니겠어? 기왕 낼 거라면 평일의 중심인 수요일이 좋겠지. 그렇게 휴가를 내버렸다.
거의 매 계절마다 궁을 찾는다. 때에 따라 대중에 공개하는 곳이 있어 이따금씩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는데, 그 덕에 언젠가의 봄엔 덕수궁 석조전 내부 투어를 하기도 했다. 야간개장은 모든 궁을 한 번씩 가고도 특별히 좋았던 곳은 재차 방문하곤 했으니. 사람들이 "전생에 궁녀였냐"라고 물어도 과하진 않을 법했다.
둘이 가도, 셋이 가도, 우르르 단체로 가도 좋으나 단연 손에 꼽는 것은 홀로 방문하는 것이다. 도심 속 궁은 조용히 사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번 휴가에도 동행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먼저 피부과에 들렀다가 간단한 진료를 받고 안국역으로 향했다. 안국역으로 향하는 3호선 열차에는 꾸벅꾸벅 조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일 오전의 여유. 어르신들은 어디로 가는 중이셨을까?
안국역 3번 출구. 카페 노티드, 어니언 같은 핫플레이스를 무심코 지나 끔찍한 부고 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빌딩을 지나면 마침내 창덕궁에 다다른다. 수요일 12시 20분. 입장권을 사려고 줄 서지 않아도 되는 시간.
"성인 1명이요."
"만 24세 이상이세요?"
"(?)네."
당황했지만 어쩐지 생각할수록 기분 좋은 질문을 뒤로하고 드디어 입궁! 검표원께서는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네셨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약간은 흐린 날씨. 기분도 그에 따라 같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기대하지 않은 인사 하나로 조금은 희망이 차올랐다.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선물로 받은 분홍색 코닥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고 한적한 궁에 들어섰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을 때 온 건 처음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언제부터 있었을지 가늠되지 않는 나무를 만났다. 세월이 너무나 오래 흘러버려서 굵은 지지대가 아니면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모습. 어쩐지 속도 텅 비었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못내 쓸쓸할 뻔했지만, 나무 앞을 지키고 있는 듯한 해태(?)가 너무 귀여워서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저 역시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외롭지 않게 함께 하는 듯해서.
늘 꽉 닫혀있어 상상력을 자극하던 건물들의 문이 모두 열려있었다. 덕분에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보이는 게 많아지자 상상력도 확장됐다. 그럴 리 없을 텐데, 내부에서 생활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살았겠구나' 싶은. 건물과 건물 사이 이동했을 통로도 한눈에 보였다. 창문도 한껏 열려 숨이 트였다. 사람들은 창 사이로 서로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나도 창문을 프레임 삼아 액자 형식으로 찍었다.
고즈넉한 궁을 홀로 걷자니, 최근에 본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떠올랐다. 모처럼 정말 재밌게 봤던 드라마였다. 어쩔 도리 없이 드라마 OST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혼자만의 산책을 즐겼다.
보통 창덕궁에 들리면, 으레 코스처럼 창경궁까지 보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창경궁까지 보면 돌아갈 길이 너무 아득해지기도 하고, 빈 속에 나왔던지라 허기가 졌다. 지난가을쯤 방문했을 적, 근처에서 식사한 기억이 떠올라 망설이지 않고 향했다. 손님은 나뿐이었고, 4인석에 앉는 호사를 누렸다. 근래의 나는 무엇 하나 잘 먹지 못하여서, 어느 정도 먹고 남길 생각으로 모둠 채소구이와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무리 따스해졌다곤 하나 1시간 넘게 밖을 떠도느라 손이 차가워져 있었다.
아메리카노가 먼저 나왔다. 지난겨울, 그가 내게 쥐어줬던 핫팩처럼 따스한 머그잔을 그러쥐었다. 식당 벽에는 먼저 방문한 사람들의 메모가 잔뜩 붙어있었다. 사랑을 약속하는 이, 직장동료와 우정을 다지는 이, 탄생의 축복을 기다리는 이... 고운 색연필도 잔뜩 놓여있었는데, 홀로 온 사람이 남긴 것은 없어 보였다. 모두 나처럼 곁눈질로 훑다가 가는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둠 채소 구이가 나왔고, 나는 제법 고상한 사람인 양, 채소를 조금씩 앞접시에 덜어와 나이프로 썰어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역시나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채소 하나하나 맛을 즐길 수 있어 슬그머니 기분이 좋았다.
밥을 먹으면서 보고 싶던 영화가 떠올랐다. 또 다른 궁궐에 갇혔던 인물,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한 영화, '스펜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그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가 되었다던데. 오늘이다! 광화문 근방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어 지도를 보다 역시 가보고 싶어 했던 극장을 찾아냈다. 여기다! 극장으로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걸어갈까 고민했지만 이미 충분히 걸은 뒤였다. 지도를 보니 가는 길에 교보문고가 있었다. 광화문 교보문고는 간 지 정말 오래됐는데! 영화 시간까지 시간도 남았겠다, 교보문고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사고 싶던 책 이름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어쩐지 맘에 들어오는 소설 한 권을 샀다. 극장까지는 걸어갈 만한 거리어서,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어쩐지 단전에서부터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우니 나 자신도 가득 찬 기분. 내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극장이라 얼마쯤 쭈뼛거리다 겨우 티켓을 샀다.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극장 건물 건너편 카페로 갔다. 이름이 익숙해 보니 회사 근처 커피 맛집으로 불리는 곳의 체인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서서 따듯한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자리를 잡고 휴대폰 충전을 시작했다. 방금 산 따끈한 책을 읽는데, 카페 점원이 하트가 그려진 라테를 건네주었다. 먹은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어 커피는 얼마 마시지 못했다.
책은 생각보다 더 술술 읽혔다. 이름 때문에 두 명의 인물 모두 여성으로 생각하고 읽다 어떤 페이지에서 남자라는 서술이 나와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러자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사소한 오해가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지. 이런 일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일어난다. 어쩐지 씁쓸하던 차에 영화 시작 시간이 되어 얼른 일어났다.
조그마한 극장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어 검표원이 준 영화 포스터를 무릎에 올려두고 영화를 봤다. 시종일관 아름답지만 갑갑한 마음이 드는 영화. 영화가 끝나고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간 누군가 만들어준 습관이 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해가 져 있을 줄 알았는데, 봄이 가까워져 해가 길어졌는지 아직 밖이 밝았다. 퇴근 시간이었다.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웠다.
언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 SNS에 올린 글인데, 그때 당시엔 공감해 캡처해둔 글이었다.
자아를 찾아야겠지만, 여행으로 찾아질 리가 없다. 분명 집안에 있을 것이다. 집안에서 잃어버렸을 것이다. 머리끈이나 리모컨처럼
- @banjihasaram
그러나 창덕궁에서부터 광화문 극장에 이르기까지. 나는 온통 내 자아를 발견했다. 궁궐 안 오랜 시간 동안 닫혀있던 문 안에서 만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에서 만났고, 지나가는 긴 생머리 여학생을 통해서도 만났다. 오래간만에 간 교보문고의 선반 틈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교보문고 시그니처 향에서도 만났고, 어릴 적 엄마를 따라 나와 아빠를 만났던 옛 제일은행 건물 뒤편에서도 나를 만났다.
사실 SNS에 글 올린 분의 말씀이 맞을 것이다. 바깥세상에 숨겨진 나를 만난 게 아니라, 언젠가의 연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 항상 몸에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처럼, 나와 내 자아는 언제나처럼 붙어있는데 일이 바빠서, 연인과의 이별에 아파서, 놓치고 있었던 거겠지.
간만의 휴일이었다. 어떤 누구와 함께 했던 날보다 행복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시간. 오롯이 나로 가득 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