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어플로 만난 것

#천왕성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by 에고고 프로젝트

토요일 저녁 이태원 바. 핑크색 조명이 어지러이 흐르고 서로의 말소리도 희미한 공간. 외국인과 한국인 틈 사이로 친구와 나도 자리 잡고 앉았다. 어쩌면 이런 공간에 오게 되리란 걸 예감했을까? 마지막으로 입은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짧은 블랙 원피스 차림이었다. 양 어깨선부터 허벅지 선까지 시스루 레이스가 달려 제법 아찔한 의상이었다. 예쁘다며 어머니가 사주셨지만, 막상 나는 좀체 입지 않는 옷이었다.


친구와 나는 태블릿으로 칵테일을 주문했다. 친구는 달달한 칵테일을, 나는 가게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칵테일을 시켰다.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된 대학 동기였다. 막상 학교 다닐 땐 따로 본 적도 없건만. 이태원에서 한번 우연히 마주친 후로 꽤 자주 만나고 있었다. 그는 내 인생 최초의 채식주의자였다. 채식 4년 차. 어려움에 부딪힐 때 이 친구 생각이 나더랬다. 그러니 그야말로 ‘채식의 성지’인 이태원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나! 이태원에서 친구를 마주쳤을 때, 나는 애인과 함께였다. 친구가 먼저 건넨 인사에 (전) 애인은 인사를 나누었다. 친구 옆에도 어여쁜 여자분이 계셨다. 애인 사이는 아니고, 그날 어플로 처음 만난 사이라 했다.


“그래서 남자 친구랑은 어떻게 됐어?”

“끝났어.”

“너는 그분 어떻게 됐어?”

“한 번 보고 말았어. 근데 전 여자 친구한테 연락 온 거 있지.”


말도 안 돼. 지난번에 봤을 땐 얘가 솔로였는데. 다음엔 입장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 왠지(?) 마음이 급해진 나는 번뜩, 친구가 사용했다는 만남 어플이 생각났다. 만남 어플의 최강자로 불리지만, 워낙 ‘원나잇’용이라는 악명이 높아서 설치해본 적 없던 어플이었다. 애인도 없겠다, 한번 해봐?


어플을 깔았다. 우리는 술도 취했겠다 신나게 내 프로필 사진을 골랐다. 친구 말에 의하면 셀카('나'인지 알아볼 순 있지만, 충분히 잘 나온), 전신사진, 활동적인 사진이 필요했다. 셀카가 너무 많아 골치가 아팠지만, 친구는 성심성의껏 골라주었다. "이거 순전히 내 취향일 수 있어" 주의를 주면서.


이젠 스와이프 할 차례! 오른쪽으로 넘기면 NOPE, 왼쪽으로 넘기면 LIKE! 서로 LIKE를 한 사람이 매칭이 된다. 나는 쉬지 않고 오른쪽으로 엄지손가락을 넘겼다 - NOPE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다 - 친구는 '남자 물 왜 이렇게 좋냐'며 견제했지만, 나는 선뜻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 잘생긴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데 난 왜 별 감흥이 없지? 내 스와이프를 지켜보던 친구도 백기를 들었다.

“와, 진짜 너 취향 모르겠다.”

“나도!”


어플에 남자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내 취향에 딱 맞는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뭘 보는 걸까? LIKE를 안 한 건 아니었다. 20명 중 한두 명 주춤하다 소심하게 LIKE... 누르면 'It’s a match!'가 요란하게 떴다. 무슨 오랜 짝사랑에 성공한 것처럼 매치될 때마다 신이 나서 친구와 "꺄울!" 소리쳤다.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매치와 동시에 메시지가 쏟아졌다.


강강: 어디서 놀고 있어요??
낭낭: 마치면 저랑 한 잔?
당당: 근처에 사시네요. 좀 이따 산책 어때요?

답장은 하지 않았다. 좀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대화해야 하지? 친구는 괜찮으니 만나러 가보라 했지만, 겁쟁이인 나는 선뜻 그러지 못했다. 대신 친구와 둠칫 거리면서 노는 걸 택하고 얌전히 귀가했다.


어플 설치 일주일 후. 일요일 오후. 오전부터 서둘러 미용실에 들렀다. 정말 오랜만에 앞머리를 냈다. 어색하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져 기분 좋았다. 읽고 싶던 에세이도 두 권 사고, 여유롭게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해놓고 글을 썼다. 한참 글을 쓰고 있는데, "띠링!" 메시지가 도착했다.


창창: 작가님, 안녕하세요.


신선한 인사였다. 처음부터 반말하는 사람도 많은데. 아니, 그보다 작가님이라니? 소개글에 Writing이라고 써두긴 했지만, 작가라곤 안 했는데요? 어쨌거나 듣기 싫은 말은 아니니. 작가는 아니고, 듣고 싶은 말이라고 했더니 이 사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창창: 마감일 지켜주세요. 요즘 벚꽃 보시느라 그런지 늦으시네요.


뭐지. 재밌는데? 게다가 이전의 채팅들은 대화 텀이 길었는데,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아차, 그의 닉네임 옆에는 파란 별이 콕 박혀있었다. 검색엔진에 검색해보니 '슈퍼 라이크'란다. 오, 이 사람 나를 슈퍼 라이크 했구나. 그제야 사진과 소개를 면밀히 살펴봤다. 수상한 사람 같지 않았다. 점점 글은 안 써지고, 대화에 빠지고 말았다.


천왕성: 뭐하고 계세요?

창창: 카페에서 자격증 공부하고 있었어요.

천왕성: 저도 카페에서 글 쓰고 있었는데!

창창: 혹시 스타벅스에 있는 건 아니죠?


나도 아까부터 휴대폰만 잡고 있는 후드티 뒤집어쓴 남자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스타벅스에 있지 않았다. 얘기 좀 나누다 보니 재미있는 사람 같았고, 실제로 만나서 대화 나눠보고 싶어졌다. 일단 해도 떠있고. 공원 같은 데서 만나면 안 무섭잖아?


창창: 그건 만나서 얘기해줄래요.
천왕성: 헐. 저도 지금 만나자고 할랬는데.


그렇게 1시간 뒤. 강아지들이 가득한 공원 벤치에서 그를 만났다.



'전반적으로 검은 옷차림에 갈색 코트'라는 인상착의. 무거운 가방과 한쪽 손에는 스타벅스 포장박스. 한눈에 봐도 확실했다. 저 사람이다! 공손하게 90도 인사부터 날리고 싶었으나 나도 모르게 아는 사람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는 퍽 당황해 보였지만 얼른 달려와 인사했다. 사진보다 멀끔한 모습의 그는 정말 하나도! 수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는 오빠랑 닮아 보이기까지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걷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걸었다. 그는 내 소개글을 읽고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안와 '슈퍼 라이크'를 눌렀다고 했다. 이렇게 보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갑자기 '현피'를 뜨게 될 줄이야? 그는 공대 출신으로 지방에서 출퇴근하며 지낸다 했다. 최근 결혼정보회사에도 관심이 생겼으나 이내 마음 접었다고. 사람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해 토로했다. 그렇게 공원을 몇 바퀴나 돌았을까. 슬그머니 배가 고팠다.


"괜찮으시면 식사하실래요?"


근처 야끼소바 집에서 야끼소바 하나와 하이볼 2잔을 주문했다. 그때부턴 소개팅과 다름없는 느낌이었다. 다만, 주최자가 서로일 뿐. 일 얘기, 사는 '낙' 얘기.. 하이볼은 금방 바닥났지만 어쩐지 더 주문하진 않았다. 숙주나물 몇 가닥씩을 얼음물과 함께 삼켰다. 슬슬 집 가서 청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 그가 산책을 권했다.


밤거리에는 벚꽃이 잔뜩이었다. 따스한 날씨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SNS에서 '누구랑 걷든 사랑에 빠지기 쉬운 날씨니 조심하라' 경고할 만했다. 나도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지만, 글쎄. 설렘보단 감사한 마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벚꽃을 보았단 사실이 감사했다. 떠오르면 또 말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에게도 가감 없이 감사함을 전했다.


그는 헤어지는 길에 연락처를 물어보았지만, 망설여졌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다시 볼 것 같지 않았다. 난데없는 하루 추억으로 충분했다. 내가 정직하게 말하자 그 역시 젠틀하게 마무리해주었다. 정말. 수상하지 않은 사람..!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 어쩐지 이 예쁜 벚꽃 한번 같이 봐주지 않은 애인이 떠올랐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다시 일기장을 꺼냈다. 편지 형식을 빌린 일기였다. 아직은 만남 어플이든, 소개팅이든. 할 수 없는 걸까? 한 사람 만나본 것만으로 알 순 없는 일일 테지만. 하루를 만나든, 100일을 채 못 만나든. 그때마다 만남은 내게 많은 걸 알려주지만, 아직은 그가 내게 알려준 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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