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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ja Jul 08. 2021

그날 그랬다

글 좀 잘 써보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1

그날 그랬다.


12월, 한겨울이었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날따라 그냥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핸들에 턱을 괴고 차 앞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내리는 눈을 바라봤다. 겨울이라 낮이 짧아 7시쯤이었는데도 하늘은 검었다. 하늘에서 누군가 하얀 물감을 붓에 흠뻑 적신 후 있는 힘껏 뿌려대는 것 같았다. 진공. 눈과 나 말고는 소리도 빛도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별안간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아니,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관계의 이름만 남을까 두려웠다. 누구 엄마, 누구 아내, 누구 며느리와 딸.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 그날은 그랬다.    

연극을 하다 결혼을 했다. 임신 8개월 때도 무대 위에서 맹렬하게 대사를 읊었다. 무대 위에서 죽는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연극이라는 작업은 내가 물리적으로 속한 세상과는 시곗바늘이 다르게 돌았다. 연습 기간에는 오전부터 밤까지 지하 연습실에서 햇볕도 쬘 수 없었다. 남편이 퇴근 준비를 할 때 나는 출근 준비를 했다. 당연히 주말도 없었다. 그리고 더욱 당연히, 버는 돈도 없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 한 편에 미래를 바들거리던 무명배우의 생활은 안팎으로 고달팠다. 어느 날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단원들과 뒤풀이 술을 한 잔, 아니 두 잔, 아니 많이 마셨다. 나는 취해서 ‘작사, 작곡 놀자’의 노래를 불렀다. 서러운 무명배우도, 이해 못 하는 남편도, 내 젖을 기다리는 아기도 모두 모두 행복할 그야 아아 아.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도착했다. 집 문 앞 계단에 남편이 아기를 안고 앉아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선택한 삶에서 만들어진 관계들이 나 때문에 외로워하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타협하지 않는 남편이 미웠다. 예술이랍시고 내 살에 달라붙어 있는 삶을 멸시하는 나는 더 미웠다. 그런 예술이 같잖았다. 그날 이후 난 연극을 하지 않았다. 보지도 않았다. 보지 못했다.    


나는 나한테 속았다. 연극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일에 몰두했다. 내가 속한 세상의 사람들과 최대한 타협하며 나는 내 시간을 버텼다. 운이 좋았다. 가까이 사시는 시부모님은 내 아이를 나보다도 더 지극정성으로 씻기고 먹이고 재워주셨다. 남편은 연극만 아니면, 시간과 상식의 흐름이 자신과 맞다면 어떤 일이든 도와주었다. 바퀴 두 개를 단 마차가 박자에 맞춰 잘 굴러갔다. 가끔 돌부리에 덜컹거리긴 했지만 세월이라는 도로를 천천히 가끔은 질주하며 잘 굴렀다. 어느새 연극을 보지 못하는 한 살 한 살이 쌓이면서 나는 반백 살로 치닫고 있었다. 나란 존재가 그렇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가끔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삶은 적당하게 흘러갔지만 나는 늘 허기졌다. 충만한 외적 조건에 가려 내적 갈등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기 살아있다고! 아마도 이렇게 외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한때는 아이를 잘 키우고 살림을 잘하는 친구를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 친구는 정말로 행복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알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빚어내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사람. 남편의 행복과 친구의 행복이 일치했다. 나도 그 친구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고 살았던 것이다.    


소망은 정확해야 하고 욕망은 본능적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지어낸 소설을 내가 쓴 이야기라 착각했다. 그 소설의 성공적인 결말을 향해 내 본능을 잊고 살았다. 공허한 것인지 고독한 것인지 아니면 외로운 것인지 모르게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글이 쓰고 싶었던 거다. 연극이 아니라면 글이라고 생각했다. 내 혈관을 타고 스멀거리면서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활자들을 이제 밖으로 끄집어내야 했다. 더는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또 본성에 어긋나는 욕망을 좇지도 않기로 했다. 시든 에세이든 소설이든 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그날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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