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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스막골 Jan 08. 2024

매일 아침 개처럼 일어나기

공기는 마치 질량이 있는 솜이불처럼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몸 구석구석 빈틈없이 내리눌렀다. 남편은 새벽같이 일어나 칼바람을 뚫고 출근을 하면서도 밤새 길이 얼었으니 오늘은 너무 일찍 움직이지 말고 쉬라며 내 입술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섰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다. 속마음을 감추고 듣기 좋은 말을 하며 그 뒤를 읽지 못한다고 서운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그가 쉬라고 말할 때는 진심이다. 나는 미안하면서도 그 말에 안심이 됐다. 내가 이것저것 도전해 본다면서 겨우 교통비나 벌 때도 조바심 한 번 내는 일 없이 그저 그날그날 내가 한 일을 들어줬다. 오늘도 다녀와서 무얼 하고 보냈냐고 물을 것이다. 아마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그저 누워서 하루를 보냈노라고 이야기해도 그렇구나 할 사람이다.


나는 누운 상태로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어제저녁 둘이 한 잔 하며 먹은 것들이 그대로 싱크대에 들어있었다), 수건 빨래(오늘 세탁기를 돌리지 않으면 내일 쓸게 없다), 지인들과 하는 모임에 공지 낼 것(게으른 주제에 회장을 맡은 모임이 두 개나 있다), 영어 공부, 사놓고 안 읽고 쌓아놓은 책더미, 지난주에 인터뷰한 내용 기사 쓰기,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못 끊을지 알고 있는 드라마 다시 보기 등 해야 할 것과 안 해도 될 것들이 두서없이 떠오르고 밀어내고 혼자 시간표를 백 번은 짜다 보니 시간은 벌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기다리다 지친 뽀송이 짖는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거실을 통과해서 방 안에 있는 내 귀에까지 들렸다. 이불속을 파고들며 늦잠을 자던 몽이는 뽀송이 짖는 소리를 듣자 자리를 박차고 거실로 나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분노했다. 이제 새 해가 되고 14살이나 먹은 할머니 몽이는 잠자는 시간은 늘었지만 성깔은 여전했다. 나는 지금 안 일어나면 오늘 하루가 지금 내 머릿속처럼 엉망이 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거실로 나오자 마당에서 오매불망 거실 창을 바라보다가 나랑 눈이 마주친 뽀송이가 펄쩍펄쩍 뛰는 게 보였다.


목줄을 풀어주니 신이 난 뽀송이는 우선 전속력으로 집 주변을 한 바퀴 뛰었다. 힘차게 땅을 박차는 뒷다리에서 탁탁 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밥그릇과 물그릇을 돌아보는 내게 얼른 가자고 멍멍 짖는 뽀송이의 몸통이 통통 튀어 올랐다. 리드줄을 한 손에 들고 등산 스틱을 잡자 익숙하게 앞에서 방향을 잡는다. 웰시코기는 양몰이 견이라더니 뽀송이는 자신이 리드하는 걸 좋아한다. 적당히 앞에서 먼저 길을 확인하고 괜찮으면 돌아서서 내가 올라오길 기다리곤 한다. 그렇게 적당히 2~3미터 앞에서 길을 튼다. 때로는 걸음이 느린 내가 겨우겨우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뽀송이는 양 옆의 산등성이를 다 확인하고 내가 있는 자리로 돌아온다. 그 사이 자기가 생각하기에 재밌는 게 있으면 그 자리에 서서 내가 그걸 함께 보고 반응해 주길 기대한다. 그건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눈을 보여주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신기한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발견한 것을 한 번 보고 내 눈을 또 맞추며 빛나는 표정을 보면 무언가 알아들은 척을 안 할 수가 없다. 세상에 온갖 신기한 일 투성이인 2, 3살 아기가 하는 옹알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아이의 발견을 응원해 주는 엄마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딱 20대 초반을 넘어서부터는 이유 없이 거리를 걸어 다녀 본 일이 없었다. 산책은커녕 친구들 만나기도 귀찮았다. 야근에 치여서 일요일에 하루 겨우 누워있을 수 있는데 굳이 씻고 화장하고 차려입고 나가서 커피를 마시며 농담으로 보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매일 그 자리에 있는 산이고, 나무고, 꽃이고 굳이 찾아다니며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시들어버릴 꽃다발 선물이 가장 사치스럽고 낭비라고 생각했다. 정원이란 걸 가꾸는 사람들은 돈과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들일 거라고 믿었다. 매일 피고 지고 사라져 버리는 데 저 아까운 시간과 체력을 쓰다니.


뽀송이는 어제 간 길을 오늘 걸으면서 또 열심히 냄새를 맡고 세심하게 살피고 호기심에 차서 두리번거리는데 나는 그런 뽀송이가 어제도 오늘도 신기했다. 똑같은 동네, 똑같은 길, 똑같은 산이잖아. 그런데 이 아이는, 그런 이상한 일을 내가 가장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일을 매일매일 하며 행복해했다. 이른 아침에 약속이 있어 산책을 하지 못한 상태로 외출하게 되면 괜스레 미안해서 개의 눈길을 피할 정도다.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는 없으니 뽀송이는 왜 오늘은 산책을 가지 않는지, 지금 나가면 언제 돌아오는지, 돌아오면 늦게라도 산책을 시켜줄 건지 알 수가 없다. 산책을 하면서 행복으로 통통 튀는 뒷모습을 자꾸 반복해서 보다 보면 그 하염없는 기다림이 더 크게 상상이 됐다. 나는 하루에 고작 그 한 시간의 행복을 빼앗은 것이다.


나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이고 반복적인 일을 못 견딘다. 처음 산책을 시작하면서 하루에 고작 3000걸음을 걷고도 종일 골골대고 점심 때면 병든 닭처럼 졸던 나는 이제 하루에 기본적으로 1시간 반을 뽀송이와 함께 걷는다. 처음엔 일주일에 2,3일을 겨우 나섰다면 이젠 일주일에 하루 빼먹기도 어려워하며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다시 겨울이 왔다.


사계절을 두 번 보내고 나자 내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반복되는 계절을 맞고서야 처음으로 집 앞에 보리수나무가 있다는 걸 알았다. 버찌 나무는 키가 아주 높고 뒷 산에는 산딸기가 열렸다. 향이 진한 꽃도 피었고 목단은 SNS에 올리면 한 뿌리 얻을 수 없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뽀송이는 다 알고 있었다. 한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것 같은 땅에서도 길고양이의 발자국을 찾아냈고 기온이 높아져서 땅이 폭신해지면 조금씩 움트는 새싹 냄새랑 두더지가 건드려서 볼록 솟은 흙의 냄새를 구별했다. 그래서 내가 똑같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길이 매일매일 새로웠던 것이다. 나는 똑같은 자리에서 어린 가지를 펴고, 작은 연초록 싹을 밀어 올리고, 열매를 맺다가, 잎을 말리며 겨울을 견디는 나무의 모습을 두 번이나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이젠 나도 어제 갔던 그 산에서 똑같은 오솔길을 매일 설레는 기분으로 들어서게 됐다. 메말라 버섯거리는 낙엽이나 반쯤 쓰러져 뿌리가 드러난 상태에서도 겨울을 견디고 다음 봄을 기다리는 나무가 다 신비함으로 가득 찬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힘들게 노력하지 않은 것은 얻을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라고 기준을 세운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뛰어나고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는 생각까지 하니 하루하루가 패배감으로 절어있었다. 버석거리는 가슴에도 어디다 투정 한 번 하기 힘들었던 것은 내가 더 열심히 더 잘하지 못해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뽀송이가 알려준 사실은 세상엔 애쓰지 않아도 내게 선물로 주워진 게 많았는 것이었다. 세상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집 앞 버찌 나무에 버찌 따러 오는 다람쥐, 춥다고 닭장에 숨어들었던 고라니 새끼, 잘 익은 김장 배추,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뽀송이, 여전히 정정하게 까탈을 부리는 몽이, 밥 해 먹이길 좋아하는 남편, 나를 품어주는 부모, 형제. 이 모든 게 선물이었는데 나는 벅차게 주워진 것들을 보지 않고 내 손바닥만 아프게 꽉 쥐었던 것이다.


매일 새로운 기대에 차서 아침을 맞는 강아지를 따라 걸으며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세상에는 행복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아니 굳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뽀송이는 내가 조금 늦잠을 잤다고 어제 산책을 못 나갔다고 오늘 아침의 산책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다. 오늘이라도 산책을 나간다면 그건 그거대로 행복해한다. 어제 일로 오늘을 망치게 두지 않는 것이다. 매일 우울할 이유 100가지를 찾을 수 있었던 내게 그저 꼬리를 살랑거리며 지금 빨리 일어나서 나가자 한다. 지금 빨리 가서 선물을 풀어보자고. 혹시 다리가 좀 아프고 지치거든 자기 등을 내어줄 테니 쓰다듬으며 자기나 예뻐하라고 기대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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