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제일 좋아했던 책이 '해리포터' 시리즈였다. 나 하나 사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데 굳이 생생한 다른 사람들의 힘듦까지 볼 엄두가 안 나서 소설은커녕 에세이 쪽도 거들떠도 안 봤다. 웬만한 일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판타지라는 분야가 그나마 해방구였다. (해리포터 전에는 무협지를 봤다. 개인적으로 사파 쪽을 선호한다.)
고등학교 때는 야간자율학습을 하다가 한참 재밌게 수다를 떨고 있는 친구에게 "그렇게 힘들면 그냥 울어!"라고 말해버렸다. 다들 웃고 떠드는 와중에 나는 그 친구가 왜 이렇게 답답했는지 그렇게 친구한테 화내듯 질러버리고 '아~ 이젠 나만 미친년이 되겠구나!' 절망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 친구가 그때 자기 마음을 어떻게 알았냐면서 내 덕에 실컷 울고 기분이 나아졌다고 말해주는 바람에 살아났다. 지금도 나는 그 친구가 왜 울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묻지 않았고 그 친구도 얘기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는 능력은 축복이 아니었다. 나는 수시로 슬프고 절망했는데 그중에 절반 이상이 내 문제가 아니었다. 한 공간에 같이 있기만 해도 그 사람의 감정의 파동을 그대로 떠안으면서 내 에너지는 수시로 고갈 됐다.
30대에 사회복지를 공부했던 건 이런 공감 능력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누군가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건 이 일을 하려면 감정이입의 정도를 조절하는 능력이 필수라는 것이다. 공감을 넘어서 내 일처럼 아파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상처 입고 자기 삶을 망치는 사람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결국 실습까지 다 마치고 몇 가지 봉사를 해보고 그 길을 포기했다.
지금은 조금 요령이 생겼다. 마음에 문을 하나 만들어서 평소엔 닫아두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크고 무거운 문을 달았다가 열고 닫는 게 쉽지 않아 더 낑낑거리기도 하고, 어느 틈에 녹이 슬어 큰 바람이 불었을 때 새어 들어오는 기운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문을 달았다는 것만으로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꾸준히 열고, 닫고, 기름칠하면서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지금은 그 능력을 가끔 꺼내 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등 이외에 사람 간에 어떤 마음의 파동으로 문제가 생기는지를 분석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음속만 파고들어 가 솔루션을 찾는 것까지만 하면서 그렇게 스스로 열 가지 중에 아홉 가지를 모른 척하며 사는 죄책감을 덜어낸다. 아마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이 과정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시골살이에 이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읽어보시고 덜 힘드셨으면 좋겠어요.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당신이 힘들면 제 마음이 힘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