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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스막골 Aug 24. 2023

'왜 태어났을까?'는 40대에 하는 게 좋다

십 대에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같은 걸 생각하기엔 지금 사는 생도 벅차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학교에 가서 12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주말에도 학교에 불려 가면서 당장 매달 매달 닥쳐오는 시험과 도통 오르지 않는 성적과 친구들과의 미묘한 관계를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숨이 막혔다. 학원을 안 다니면서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방법도 모르겠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리 따위를 고민하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넘치는 호르몬이 주체가 안되던 사춘기 시절에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가장 만만한 부모한테 화풀이하느라 "나를 왜 나았어요?" 따위의 소리를 하는 것 말고 '내가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지'를 진심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은 그냥저냥 반항 좀 해보거나 이해도 안 되는 철학책 좀 뒤적거리다가 포기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도저도 모르겠는데 도저히 생각할 엄두가 안 나면 신에게 떠맡기기도 한다.


나는 40대에 이 질문을 꼭 다시 꺼내라고 권하고 싶다. 40대면 보통 사회에서 쓴 맛도 좀 봤고, 아이가 있다면 부모 역할하느라 정신없이 달려서 이제 막 그 어마어마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진입시켰을 거고, 운이 좋다면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이다음은 자칫 꼰대로 사회에서 구제불능의 무리로 치워지거나, 이른 은퇴가 목전에 닥쳐서 급박해지거나,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켜야 해서 다시 돈 버느라 정신이 나가거나, 부모님과 제대로 이야기도 해보기 전에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이 적기다. 지금 하지 않으면 너무 뻔하지 않은가. 돈 버느라, 가족에 헌신하느라, 건강도 잃고, 취미도 없고, 감사했다고 말씀드려야 할 부모님이 안 계시다며 우는 수밖에.


'왜 태어났을까?'도 좋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도 좋다. 우리 또래까지는 대체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살았다. 그냥 해야 한다니까 그런 줄 알고 공부했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 살려고 노력했고 자식을 잘 키우려고 애썼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고민하고 가족 안에서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와 역할을 요구받고 있고, 그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해 본 적이 없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그걸로 괜찮은지, 더 필요한 게 있는지 들여다보고 요구하고 그 결과로 수용하고 수용받고 양보하고 쟁취하는 과정을 꼭 거쳐봐야 한다. 태어나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태어남으로써 기본값으로 받았던 세팅을 가지고 살아온 게 40년이라면 이제 남은 인생을 어디로 보낼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고 꼭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갑자기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거리의 음악가가 되거나, 내 인생을 찾아야겠다며 졸혼을 선언하거나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진짜 여기까지 갔다면 그건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을 뿐이다.) 다만 조금 더 편안해질 것이다. 정말 음악이 하고 싶다면 지금 현재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 들을 찾아 30분씩 1시간씩 도전해볼 수 있다. '왜 어릴 때 내 재능을 키워주지 않은 거야?' 따위의 원망을 쏟아내기엔 40대는 우세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플해질 수 있고, 대신 자신의 삶에 윤기를 더해주면서 나머지 일상에도 한결 활기가 돌 것이다. 또한 사회의 고달픔과 부모로서의 애닮은 시간을 알고 난 40대는 이제 다른 가족들과도 화해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관계를 하나하나 되짚고 이해하다 보면 스스로의 그릇이 단단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럼 나를 잃지 않고 나와 전혀 다른데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시간을 가져야 앞으로 자식을 건강하게 독립시키고 부모님과 늦지 않게 화해를 할 수 있다.


'왜 태어났을까?'를 아무리 머리 싸매고 고민해도 나는 도통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나야말로 어릴 때는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화를 내며 부딪히고 다니기도 하고, 신에게 답이 있을까 매달려도 봤다. 그러나 답이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러울 뿐. 할 수 있는 한 다 해보고 나온 결론은 내가 그나마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어떻게 죽을지'를 결정하는 것, 이거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사전연명의향서'를 쓰니 마니, 요양원에서 죽니, 집에서 죽니 하는 방식도 더 전에 내가 당장 내일 죽을 때 편안할 수 있는 가는 내가 오늘을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 가족과 친구와 사회와 더 나아가서는 나를 숨 쉬게 하는 지구와 동물과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죽을 때 내가 한결 편안할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렇게 끝을 염두에 두고 다시 나를 돌아보면 지금 죽도록 매달렸던 것 중에 덜어내도 될 것과 못 보고 지나쳤는데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게 생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스스로 위로받고 스스로 기준이 생기고 그리고 편안해진다. 


제주 풀무질 책방에서 찍어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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