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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스막골 Oct 05. 2023

내 몸과 화해하기

 나는 어릴 때 한 번도 내 몸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한 번 도라는 표현이 이상할 수도 있는데 한 순간도 그랬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키도, 얼굴도, 몸매도, 피부도, 머릿결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얼굴 하나만 놓고 봐도 눈도 크지 않고, 코도 높지 않고, 그에 비해 입은 크고, 심지어는 목소리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발표 하나를 하려면 일어서기도 전부터 긴장해서 얼굴이 시뻘게지곤 했다. 키는 또래보다 컸는데 그것 역시 그리 자랑스러운 건 아니었다. 유치원 때부터 개학 첫날은 '너 언니인 줄 알았어!', '3학년 언니가 반 잘못 들어온 줄 알았어!'가 인사의 99% 였다. 그럼 그다음부턴 괜히 어깨를 움츠리고 친구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나만 혼자 자꾸 멀뚱히 커서 툭하면 짝 없이 앉는 것도 괜히 서러웠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꽉 찬 채로 20대가 되고, 나는 많은 걸 놓쳤다. 자존감이 바닥인 나는 내가 선택해서 무언갈 해낸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이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 일을 몸이 부서져라 했다. 심지어는 그 일이 내게 정말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놓지를 못했다. 내가 나를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 나를 가꾸거나 나를 위해 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두지 못했고, 그래서 내 삶의 이유는 나를 인정해 주는 '남'이었다.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게 된 건 30대 초반부터였다. 나는 치아가 아주 건강했지만 전체적으로 앞니가 살짝 정말 살짝 돌출형이다. 이게 진짜 애매한 게 치과에서는 교정을 거부할 정도인데 사진은 정말 별로다. 스스로 그걸 알고 있으니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더 긴장하고 뻣뻣해져서 엉망이었다. 도톰한 입술도 무식해 보이는 거 같아서 가능한 입에 사람들의 시선이 안 가도록 최대한 옅은 색의 립스틱을 바르거나 아얘 바르지 않았다. 말을 하거나 웃을 땐 손으로 입을 가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활짝 웃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고 그때 알았다. 차라리 이가 보일 정도로 크게 웃으면 내 약점이 티가 안 난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입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더 활짝 웃었다. 다행히 웃기는 잘 웃는 성격인 데다 가려야 한다는 강박이 없어지자 더 편하게 잘 웃을 수 있었다. 이제는 눈이 따갑도록 아이라이너를 그리고 마스카라를 발라대던 화장을 멈추고 그냥 립스틱을 발랐다. 


 그 후로 10 년 동안 나는 나이를 먹는 만큼 조금씩 나를 용서하기 시작했다. 다시 태어나도 또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나'니까 실패하는 '나'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야 진짜 내 몸하고도 화해를 시작한다. 내게 가치를 두지 못하는 삶을 사는 동안 나는 내 몸 역시 방치해 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연예인처럼 예쁘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노래나 춤은 빵점이어도, 건강한 몸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저 세끼 챙겨 먹으면 (회사 다니며 그저 시간 맞춰 때웠더라도) 크게 아프지 않고 살아온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어릴 때는 몰랐다. 그저 나는 내 발목이 두꺼운 것만 속상했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나를 긍정하고 받아들인 건 좋은데 아무 때나 자고 아무렇게나 먹은 것들이 몸속에 독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결정타는 시험관 시술이었다. 주사와 약으로 호르몬을 때려 박는 것을 3차례 한 후 드디어 내 몸이 균형을 잃고 여기저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미 그전에도 물려받은 내구력이 좋아서 버티고 있었을 뿐인데 이제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몸도 역시 내 것이라 그런지 인내심이 좋아서 미리미리 힌트를 주지 않고 막판까지 참을성 있게 버텼다. 나는 안다. 그다음은 화산 폭발이다.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단주를 하고 절식을 시작했다. 음식에 간을 모두 끊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산책을 한다. 먹을 것에 대한 강박을 잘라내고 나니 일에 집중할 시간이 생겼다. TV를 켜지 않고 천천히 생각할 여유를 가지니 그동안 해결하지 않고 가슴 한편에 쌓아둔 일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지금 내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다시 돌아보고 있다. 매일 체하던 게 없어지고 두통과 손 끝 저림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내가 내 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일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 몸을 돌보기 위해 아끼기 위해 계획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평생 이렇게 수도승처럼 살 거란 뜻은 아니다. 그렇게 살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노인이 되기 전에 내 몸을 스스로 돌볼 줄 아는 인간으로 변할 수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란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이렇게 좌충우돌, 못난이 같은 짓을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지금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는 몸을 물려줘 놓고 온갖 원망을 들은 부모님께 이제 와서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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