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밤까지 집을 치우고 밥을 해서 식구들을 먹이고 아이를 낳고 남편인 왕릉이 의기소침하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도 조용히 먹을 걸 구하러 나가는 오란.
그런 오란이 첫 아이를 안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떡을 해서 자신이 부엌데기 종살이를 하던 대갓집의 문턱을 넘을 땐 내 가슴이 벅차서 두근거렸고,성실하던 왕릉이 어느 날 찻집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 오란의 품 속에서 진주 한 쌍을 기어코 빼내어 갈 땐 내 가슴도 무너져 이불 뒤집어쓰고 펑펑 울기도 했다.
그 후 벌써 20년도 넘어서 다시 책장을 여니 이제야 왕릉이 보인다.
오직 땅과 그 땅을 일구어 가족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는 왕릉.
지독한 가뭄에 어쩔 수 없이 키우던 소를 잡아 식구들은 먹여도 자신의 입에는 넣지 못하고,아무리 가난하고 배를 곯아서 구걸을 해도 남의 걸 훔치는 아들은 흠씬 때려주고,처음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 소실로 들이며 ‘다른 남자에 비하면 나는 괜찮은 남편이다’라고 자기 위안을 하면서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어찔할 바를 모르고,죽어가는 오란을 보면서 그녀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느끼는 죄책감으로 더 성실히 옆을 지키는......
펄벅의 ‘대지’가 생각나는 날은 특히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다.
무얼 하면 좋을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헤맬 때.
오직 땅에 매달려 땅에 모든 걸 걸고 땅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왕릉과 그 옆에서 묵묵히 함께 밭을 갈고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오란이 보고 싶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