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 <나 같은 늙은이 찾아와줘서 고마워>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어떤 책들은 쉽게 펼쳐보지 못합니다. 세월호 참사 후 단원고 희생학생 유가족들을 인터뷰했던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그랬습니다. 책이 출간되고 2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의 상황과 슬픔을 진정으로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책을 읽고는 그 고통을 너무 쉽게 안다고 말할까봐, 깊은 슬픔들을 헤집어 보면서 이들을 동정하기만 할까봐 읽기를 미뤄왔습니다.
<나 같은 늙은이 찾아와줘서 고마워>를 들고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 생각해보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분들인데 겉표지의 할머니 사진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일부러 눈에 잘 띄지 않는 책꽂이 아래쪽 칸에 채워진 다른 책들 위에 올려놓고 며칠을 흘려보냈습니다. 어느 날 읽을 책을 찾으려고 책장을 살피는데 표지의 할머니가 안경을 벗으시며 제게 한 마디 건네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 같은 늙은이 찾아와줘서 고마워.”
책을 다시 들었습니다. '독거노인 열 두 명의 인생을 듣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노인'이라고만 해도 외로움과 쓸쓸함이 떠오르는데 한술 더 떠 '독거노인'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대면할 자신이 없어 또 다시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헌데 내려놓은 책 뒷표지"사는 모습과 생김새는 달라도 여든을 바라보는 내 부모와 너무나도 닮아 있는 그분들 삶에 대한 연민과 존경 때문"이라는 한 구절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또 “독거노인의 삶을 동정이 아닌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라는 문구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자의 바램처럼 독거노인들을 그냥 불쌍히 여기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이분들의 외로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겪어왔던 아픔을 공감하며 고통에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열 두 분의 이야기를 차례차례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견뎠습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자식을 향한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으셨던 분들입니다. 죽도록 일했지만 결국 가난을 대물림 할 수 밖에 없었던 슬프고도 처절한 현실이 절절하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 길지 않은 인터뷰 글들인데 어느 이야기 하나 단 번에 읽어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도, 얼굴이나 한 번씩 볼 수 있게 잊지 말고 자주 찾아와 달라 말씀하시는 박복례 할머니. 20년 전부터 하루 한 두끼를 라면으로 해결해 오셨고,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듯 복지단체 노인잔치가 가장 기다려진다는 고재호 할아버지. 자신은 관절염, 허리통증, 고혈압과 당뇨병 등으로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손자만은 잘 되기를 바라시는 주삼순 할머니.
한겨울에도 난방비 낼 돈이 없어 보일러도 켜지 않고 지내셔야 하는데다 거동도 불편하신데도 노인정 봉사활동을 쉬지 않으시는 이금예 할머니. 독거노인으로 살아가지만 매니큐어도 바르고 화사한 블라우스도 입으시는, 하지만 그 이면에 깊은 아픔을 간직하고 계셨던 조필남 할머니. 과도한 노동 후유증과 사고로 척추가 내려앉아 거동조차 어렵지만 자신을 챙겨주는 봉사자의 자녀들에게 용돈을 쥐어주시는 박막순 할머니.
무엇이 이분들을 이토록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것일까요? 저자는 독거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분들의 삶을 기사로, 책으로 알리면서 우리 사회의 복지 현실과 한계를 지적합니다. 해마다 연말이면 독거노인들의 고독사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그때마다 노인 정책과 사회의 무관심을 비판하지만 이렇다할 대책은 세워지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독거노인들의 외로운 삶과 고독한 죽음에 우리는 정말 아무 책임도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일까?”
“차마 꺼내기 어려웠던 독거노인들의 삶을 이렇게라도 들추어내어 알리려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독거노인이 사회적 배려와 관심, 지원의 결핍으로 매일을 죽음과도 같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며 지내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며 이들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공동체적 대책과 지원방안을 마련해주길 기대하기 때문이다.”(19-20쪽)
이와 같은 기대를 하며 저자는 기사와 책을 썼습니다. 당시에 글을 통해 알려진 노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저자는 보람과 감동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또한 국가가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찾아내 실질적 도움을 주고 친구가 되어주는 착한 이웃들도 있었기에 작은 희망을 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기사로, 책으로 독거노인의 이야기를 알린 지 7,8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독거노인 지원 정책은 어떠했는지, 과거보다 나아지기는 했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여전히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을 주변 관심있는 이웃들이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폐지를 모으시는 분들은 과거보다 더 많이 눈에 띕니다. 모든 분들이 독거노인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노쇠한 몸으로 가난과 홀로 싸우는 어른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따뜻해지는 봄날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어 상대적으로 이분들이 소외되는 것은 아닐지도 걱정됩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분들의 정책들에 노인복지와 관련된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있다면 이 책에 언급된 것과 같은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할 대안을 고민했을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새로운 정부에서 복지 정책을 기획/실행하는 역할을 맡게 될 분들은 복지 정책에 대해 저자가 강조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거노인들을 향한 복지는 무조건 베푸는 식이 아니라, 가난에 대한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역사를 온몸으로 견뎌내신 어른으로서 노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기초가되어야 함을 저자는 강조했습니다. 이와 함께 국가가 채워야 했던 자리를 대신 채워주었던 봉사자들의 호소를 대신 전했습니다.
“그들(봉사자들)은 이야기한다. 아무리 대단한 지원이라도 노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방식이어서는 안된다고. 마음을 나누는 데서 시작하는 복지가 되어야 한다고. 밥 한 끼를 대접하더라도 품위 있게 드리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바닥에 떨어진 노인들의 자존감을 높여드리는 정신적 지원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318쪽)
우리들 할머니,할아버지 혹은 부모님 같은 독거노인들이 올 겨울은 따뜻하게, 배고프지 않게, 자존감에 상처받지 않으며 지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