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발저 <호수와 바다 이야기>
낯설지만 편안할 수 있을까? 마르틴 발저, 요한나 발저, 크빈트 부흐홀츠. 내겐 무척이나 낯선 이름들이다. 독일 작가들의 책은 자주 접해 보지 않았기에 특히나 더 낯선 이름들. 마르틴 그리고 요한나 발저의 아주 짧은 글과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한 점이 이어지는 책, 호수와 바다 이야기. 이들의 이름 만큼이나 실린 글도 낯선 표현들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편안함이 느껴진다.
요동치면서도 잔잔할 수 있을까?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방울들이 빛을 반사해 안개가 되기도 하고 구름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아주 작은 수 많은 점들이 모여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점들은 좁은 범위로 보게 되면 아무런 질서가 없는 혼돈이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다보면 한 폭의 고요한 그림이 된다. 약간은 뿌연 유리창 혹은 김 서린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약간 독특한 그림들에 아주 짧은 에세이가 올려진 처음 맛보는 덮밥같은 느낌이다. 툭툭 가볍게 내던지는 것 같은 느낌의 짧은 말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는 든든히 자리를 잡는다고 할까? ‘혼돈이라는 또 다른 질서’, ‘위험 속의 안온함’, ‘술단지 속을 저렇게 빙글빙글 날아다닌단 말야’ 등의 표현들은 있을 수 없는 상황일 것 같지만 잠시 눈을 감고 상상을 하게 만든다. 아주 짧은 글들이 이어지는데 함께 곁들여진 그림과 함께 읽다보면 저자들이 적어놓은 글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가까이에 두고 자꾸 책을 열어보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차라리 내가 식물이었다면, 아니면 물건이었다면 좋았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저자들은 나의 이런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이 말한다. ‘왜 진작 나는 나무로 변해 버리지 못했나. 흐르는 물이라도 될 수 있었을테다. 앞으로, 앞으로만 흘러 나아가는. 혹은 차라리 한 개 돌이어도 좋았을 것을.’ 인간으로 살아가기에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도.
피아노를 연주할 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이 가는 대로 건반을 누르며 말 그대로 피아노를 칠 때가 있다. 그 땐 어김없이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듣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하리만치 불협화음 가운데에서 어울리는, 음악같은 화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아주 짧은 그 순간만큼은 나도 위대한 피아노 연주자가 된다. 나도 모르게 뿌듯해진다.
한 발자국만 문을 열고 나서면 화창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는데 그 문 밖에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는지 모르겠기에 두려워져 문을 열기가 망설여질 때가 많다. 용기를 내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기 직전의 순간 극에 달한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면 난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겠지. 내 앞에 놓인 여러 개의 문들을 하나씩 열어보고 싶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직접 부딪쳐가며 살아가고 싶다.
저자들은 편견 혹은 통념을 거슬러서 생각해 볼 실마리도 제공해 준다. 가령 ‘눈에 덜 띈다고 해서 과연 삶도 그만큼 적다고 할 수 있을까’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지구상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각자의 인생이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이는 100인분, 어떤 이는 1인분, 또 어떤 이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사람을 대해야겠다.
달리기를 할 때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알았다. 달리기를 할 때면 ‘내 몸의 근육들이 내게 말한다. 난 지금 나 자신을 체험하는 중이야. 정말 기뻐.’ 이래서 달리기를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거다. 이렇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정확히 드러내 주는 작가들이 있어 고맙다. 한 발 한 발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갈 때 내 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달릴 것이다. 아마도 마르틴, 요한나 발저도 달리는 느낌이 어떤지 몸으로 알고 있을 것 같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지내며 글을 썼던 콩코드 남쪽 월든 호숫가 벤치에 앉아 읽으면 딱 어울릴 법한 책이다. 이 책을 들고 월든 호수에 다시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