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도착한 첫 날.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집' 의 의미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선 한번정도는 찾아본다. 재테크에 아무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무조건 청약통장 한 개 정도는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아이를 낳으면 아직 말도 시작하지 못한 아이 이름으로 주택청약통장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결혼적령기가 되어 결혼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의 갈림길앞에 설때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금 집을 마련할 돈이 있으냐' 이다. 일단 '영끌' 하여 집을 사고, 평생 일해서 그 집값을 갚는게 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있어서 집이란 삶과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너무 부자도, 너무 가난하지도 않았던 가정에 태어난 은혜로-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그만두시지 않는다면 절때 해고될 일이 없었던 회사에 다니셨던 성실한 아버지 덕분에-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그런 조사를 왜 하는지 모를, 학교에서 준 '가정환경조사서' 에 늘 '자가' 에 동그라미를 쳤었던 어린시절을 보냈었다. 결혼할때 잠시 전세를 구했으나, 그건 굳이 따지자면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갑자기 터무니없이 급등한 집값으로 인한 나름의 작전이었고, 이후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우리의 인생 첫 집을 가지게 되었기에, 돌아보면 집없는 서러움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영국에 도착하고 히드로 공항을 나와서 임시숙소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작은 벤에 올라타 바라본 런던의 바깥 풍경은 의외로 너무 괜찮았다. 첫인상은 걱정과 달리 오히려 좋았다. 낮은 하우스 집들이 고풍스럽게 늘어져 있고, 식물과 나무가 일상처럼 보이는 풍경이 평화로웠고, 6차선, 8차선 도로에서 경주마처럼 내달리던 차들이 무서워 운전도 꺼렸던 서울시내의 교통상황과는 달리, 좁긴 했으나 2차선 도로에서 여유롭게 달리던 차들도 좋았다.
문제는 임시숙소에 도착한 직후였다. 일반 가정집 같은 하우스를 민박업소에 맞게 설계한 현관문을 여니 마치 10여년 전 영어공부를 위해 잡았던 하숙집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영국에서는 일반 하우스 안에서 학원도 운영하고, 병원도 운영하기도 한다. 그땐 그런 상황을 전혀 몰랐기에, 당시엔 일반 가정집 같은 하우스에서 민박업소를 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할 때였다. 나도 모르게 한국의 팬션 정도의 규모를 생각했던 것 같다)
좁디 좁은 아주 작은 통로 옆 우리 방이라고 들어간 곳은 정말 한평짜리 쪽방 같았다. 그 좁은 방안에 심지어 화장실도 있었다. 화장실이 있는 방이라는 구색만 맞출수 있었을 뿐, 세면대가 너무 좁아 세수를 하면 물이 그대로 옷으로 흘러내렸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생전 느끼지 못했던 '절망' 같은 기분이 온 몸을 휘감는 기분이었다. 도착한 전날엔 도합 20시간을 못잔 상태라 밤에 잠을 푹 잤지만 시차적응을 못해서인지 하루종일 병든 닭처럼 졸았다. 게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코로나 때문에 7일 격리도 의무로 해야 될 때여서, 그 하우스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9월 1일임에도 바닥부터 올라오는 한기와 습기, 그 좁디좁은 방 안에 자리한 화장실에서 풍겨오는 고약한 냄새, 여러 사람이 사용했던지라 어쩔수 없었을거라 여길수밖에 없었던 숙소의 청결상태는 정말 여기서 오래 지낸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나는 그 순간엔 정말 아이도, 남편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만큼 절망적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3년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어제 타고 온 비행기를 타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격리까지 해야했던 그 일주일 동안 한인민박 아줌마가 해주시던 삼시세끼 한식도, 가져갔던 책들도, 심지어 유투브도 전혀 내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그저 침대에 드러누워 '아이고' 대신 '하나님' 만 불렀을 뿐.... 그 와중에 도착해서 회사에 보고하고, 업무 인수인계 메일로 받는다고 쪽방에서도 노트북을 켜놓고 넋놓고 있던 부인 덕분에 아이까지 간간히 돌봐야 했던 남편은 도착 직후에도 여전히 고생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우린 한국에서 미리 영국에서 살 집을 구하고 갔기에 10일 정도 후에 드디어 쪽방을 탈출하여 우리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내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던 절망감과 우울감이 한번에 사라졌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민박집과는 다르게 '우리집'은 깨끗했고 따뜻했으며 습기와 한기가 올라오지도 않았다. 물론 화장실에서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동안 다른 이유가 아닌 우리집, 내 공간이 없었기에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무기력함 때문에 그토록 힘들었다는 것을 온전한 '우리집'에 들어오고서야 알게 되었다. 민박집에서는 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차려주는 밥을 먹을 수 있었으나, 부엌을 쓰지 못해 내가 원할 때 뭔가를 할 수 없었고(전업주부 아줌마에겐 부엌의 의미란 상상을 초월한다 음식을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ㅋㅋ),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때문에 구석구석 존재하던 묵은때를 바라보며 괴로웠었다. 가든에 나가서 커피 한잔을 마셔도 다른 손님이 계신 건 아닌지, 늘 뭔가 눈치보고 신세지는 기분이었다.
내 손으로 식구들 밥을 차리고, 내 부엌을 마음껏 쓴 후 깨끗하게 청소하고, 내 공간을 내가 정갈하게 청소할 수 있다는 것. 집 안을 마구 돌아다녀도 눈치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를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그동안 내가 몰랐던 '집'의 의미에 대해 다시 되새겨본다.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 세대엔 같은 집 안에 세를 들어 주인과 함께 살기도 하고 때로는 단칸방에서, 혹은 달동네에서 화장실과 부엌을 공유하는 공동생활을 경험한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주된 거주지가 된 것이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았음을 생각할때,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불편했을지를 내 경험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그랬기에 더욱 더 내 집 마련, 우리 가족만의 공간을 마련하는데 더 열정을 쏟아부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내 집 마련' 은 보통 가정의 1순위 꿈인 경우가 허다하다.
집은 몸만 누이는 곳이 아닌 마음까지도 누이는 곳이다. 이제껏 그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건물에 불과한 집을 매매하는데 그리 열성일까?"를 말해왔던 내가 좀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과 경험은, 때로는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 처음 약 10일간의 생활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를 칠 만큼 힘들었지만, 그만큼 깨닫는 것도 알게된 것도 많았던 10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턴 본격적으로 영국생활을 즐기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집은 정말로, 몸만 누이는 곳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도 누이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