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일,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백수'되다

적당히 잡아도 되는데, 완벽하게 잡으려다 둘 다 놓쳤다.

by 제니
이처럼 사랑은 다른 이들의 유익보다 자신의 이해를 좇는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과 정반대 편에 있는 덕목이다. 자기중심성은 바울이 열거한 바와 같이 조급하고, 쉽게 화내고, 너그럽거나 따뜻함이 배어 있지 않은 말을 함부로 쏟아내고, 형편이 더 나은 이들을 샘내고 헐뜯으며, 누군가에게 받은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을 버리지 않고 곱씹는 따위의 증상들이다.

_by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中


백수가 된 지 곧 여섯 달이 된다. 돈으로 환산하자면 000여 만원의 현금을 벌지 못한 이 기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생산성을 내려놓자고 다짐했건만, 습관은 빛의 속도로 머리를 굴리게 만든다.


11.PNG ▷'이미지 출처'_by book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中



왕복 3시간 출퇴근 속 ‘일하는 목적’을 고민하다


서른다섯, 지난 2017년은 참으로 분주하고 다이나믹했다. 이사와 주말부부, 직장생활과 육아, 아들 유치원 옮기는 것 등의 해결해야 할 산적한 과제들이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를 더 밝히는 아들과 친정 부모님께 맡겼으니 안심하고 내 생활을 하는 엄마, 두 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기싸움. 어차피 올 해부터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상황을 알기에 나는 애 봐줄 사람 있을 때 뭐든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퇴근 후에도 약속을 잡았다. 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엄마 품이 그리운 아들은 손을 빨고, 또 빨았다.(아들의 손 빠는 것을 이야기하면 남편은 ‘그냥 빨 수도 있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게 엄마와 아빠의 차이다. 그런 시크한 관점을 닮고 싶으나 나는 아들의 취약점에 '나 때문인가'라며 빛의 속도로 자책을 하곤 하지…)


왕복 3시간의 이동시간 중 스스로에게 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나의 ‘자아실현’, ‘일하는 여성’, ‘성취감’ 모두 일종의 답안이 될 수 있었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다.



‘육아’를 탈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하는 건 아닌지 반문했다. 어차피 둘 다 힘든 거 ‘돈’이라도 벌면서 힘든 게 낫다는 판단일 수도 있겠다.


육아휴직 후 회사 사정으로 복직하지 못했다. ‘아이’가 주는 ‘기쁨’을 누리는 여유보다는, 이렇게 사회에서 ‘도태’되는 건 아닌지 소속과 안전의 욕구가 결핍된 느낌이었다. 이렇게 집으로 들어와 전업주부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두려움이 몰려왔다. ‘전업주부’는 매우 숭고한 역할인데, 나는 아직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데 ‘부족함’이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역할’을 너무 크게 생각했기에 위기에 봉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육아를 탈피하기 위해'일을 하면 좀 어떤가. 남자들은 '아빠'가 된 이후에도, '육아를 탈피하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데 말이다. 양가부모, 여의치 않으면 '도우미 이모' 등 육아를 더 잘할 사람에게 대행할 수도 있는건데 말이다.)




요리조리 피해 가다 ‘모성’에 발목 잡히다


80년 대 초반부터 2000년 대 초반 출생한 세대를 가리켜 흔히 ‘밀레니엄 세대’라고 한다. 83년 생인 나는, 베스트셀러가 된 ‘82년 생 김지영’과는 다르게 자라왔다.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연년생 남매를 ‘평등’하게 대한 우리 집에선, 고기를 먹을 때면 항상 아빠가 고기를 구웠고(어떤 집은 항상 엄마가 구웠다고 한다. 남편 집도 그러하다.) 극진한 아빠의 사랑으로 어려서부터 아빠가 차려준 밥을 먹고, 아빠가 빨아준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


비슷한 성향이라 더욱 지지를 많이 해준 아빠 덕분에 ‘자기주도 학습’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일하기 시작한 엄마를 보며 ‘일하는 여성’을 보며 자라왔다. 당차고 진취적인 엄마와 배려와 섬김을 보여준 아빠, 그런 가정환경 속 알게 모르게 나는 주관이 뚜렷하고 오빠에게 양보하기보다는, 경쟁을 벌이며 승부하고 발전해왔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페미니스트 또는, 여성 상위주의라 말할 것이다. 부분적으론 맞고 부분적으론 틀리다.



취업 시즌 자기소개서를 쓸 때 성장과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가정적인 아버지와 진취적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저는 양성성을 고루 발전시키며 ‘일하는 엄마’의 롤 모델을 보며 자라왔습니다.”



지극히 경쟁적이고, 성취적이며, 야심만만한 알파 걸 류의 이미지였다. (‘였다’라는 과거형은, 사회생활 속 부딪히고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도 아킬레스 건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육아’와 ‘모성애’였다. ‘엄마’라는 두 글자는 사는 곳, 직업, 성향, 몸매, 가치관 등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경쟁이 치열한 직장에서 야근을 하며 일 하는 건 ‘엄마’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하나(일 or 가정)’를 포기해야 한다, 등의 선입견이 작용했다. 어쩌면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정말 유능한 여성 직장인들은 일을 하면서 육아 또한 잘 할 텐데 말이다.



‘일’도 하고는 싶은데 ‘육아’는 너무 힘들 것 같고, ‘엄마’로서 ‘이상적인 이미지’는 있는데 ‘엄마 역할’은 하기 싫은. 일종의 잔머리 일지도 모른다.



운 좋게도 ‘하기 싫은 것’들을 하지 않은 채 지름길로 지금까지 잘 온 덕도 있겠다.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잘 하는 것’을 해서 돋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취약하거나 어려운 것’은 성과를 낼 수 없는 게 머릿속으로 그려지니 최대한 ‘열외’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마도 노력했을 것이다.


‘육아’또한 그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엄마’가 되곤 싶으나 ‘엄마 역할’을 잘 할 자신은 없고, ‘일’도 하면서 ‘자아실현’도 하고 싶었다. 결국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내 위주’의 상황을 만들어 갔다. 육아지원을 줄 친정 근처로 이사를 가고, 일, 가정 양립이 가능할 것 같은 회사를 ‘선택’했다.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순수한 동기에서인지, 생활 속 필요성 때문인지, 아니면 내게 ‘주어진’ 육아에서 ‘열외’이고 싶어서인지는 모두 다겠다.




“육아와 남편 내조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맞벌이 가정이 그렇겠지만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친정 도움을 받으며 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지만, 남편과 나의 출, 퇴근 시간은 왕복 3시간이 넘었다. 아침 8시 30분이 출근 시간인 남편은 더욱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육아에 서툴고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집에 오면 ‘육아 모드’로 돌아와 쉴 새 없이 몸을 혹사시켰다. 출산 이후 남편은 ‘대상포진’을 겪으며 몸이 점점 안 좋아졌다.


누적된 피로는 그렇게 쌓이는지, 극도로 나빠져가는 남편의 건강을 보며 ‘이 길이 맞는 것인가’하는 회의가 들었다. 이것이 우리 가정에 최선인가, 때마침 아들 유치원을 옮기고 종일 반에 떨어진 후, ‘하원 도우미’를 구하는 문제에 직면한 뒤 고민은 더욱 계속되었다.



‘내 욕심’으로 온 가족을 혹사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 한편에 이 기회에 ‘쉬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도 작용했다.



여자 월급이 어떤 기준 이하면 집에서 일하는 게 낫다는 식의 암묵적인 대답들도, 도우미 비용으로 150 ~ 200만 원을 줘야 하는 현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아프거나 등 하원을 책임져야 하는 주체가 '여성, 그리고 엄마'인 이 현실도 만만치 않았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아이와 애착을 잘 쌓고 내가 낳았으니 어느 정도는 책임지자는 책임감과 모성애가 발휘됐다. 그동안 하던 일을 미래에도 할 수 있는지 비전과 가치를 따졌을 때 yes라는 대답이 안 나온 것도 물론 있지만. 돌이켜보니 그 또한 '나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부족한 엄마다.'라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가 작용한 것 같다.


“육아와 남편 내조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갑니다.”라는 나의 말은 사실 핑계일 수도 있다. 더 이상 붙잡을 수도 없는 ‘일’과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다는 ‘욕심’, ‘좋은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보고 싶다는 ‘욕망’의 혼합으로 벌어진 일인지도 모른다.



지난 3월, 아들의 유치원 새 학기를 맞아 그렇게 ‘반 자발적인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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