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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 Aug 22. 2019

호구의 재정의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호구'


뒤늦게 당근마켓에 빠지다 


7월에 가입한 <당근마켓>, 늦바람이 무섭던가... 난 이제야 알게 되어 가입했는데 때마침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답시고 좁은 집구석 구석 처박혀있던 온갖 물건들을 팔아 치우고 있다.


첫 번째는 육아용품으로 웬만한 건 처분했으나.. 큼직한 것들... 둘째 낳을지 몰라 쟁여놓은 것들 아주 싼 값에 과감하게 올렸다. 괜찮은 물건을 싼 가격에 올리는 것이 가장 잘 팔리는 지름길이란 것을 새삼 느꼈다.


그렇게 시작한 당근마켓은 생활용품 중 사놓고 안 쓰는 예쁜 쓰레기들을 처분했다. 스타벅스 머그컵, 굿즈 등 충동구매로 사놓고 쓰지 않는 것들을 싼 값에 올려놓으니 스벅 마니아 분들이 사가 주셨다. 직거래를 했는데 연령대가 50이 넘은 중년 아주머니께서 나오셔서 깜짝 놀랐다. 20~30대만 모으는 줄 알았는데 스벅은 역시 고루고루 팬층이 두꺼운 걸 확인했다.


그다음, 가성비 추구로 인해 사놓은 것들을 하나씩 처분했다. 올 겨울 아들과 베트남 여행을 가서 끙끙거리고 사온 라탄 가방을 2~3개 판매했고 그 외 다양한 것들을 싼 값에 처분했다. 이건 뭐 파고 파도 계속 나온다. 남편은 늘 나에게 우리 집은 물건이 포화상태라고 했는데.... 왠지 알 것도 같다 ㅎㅎㅎㅎ




사랑에 흠뻑 빠지다 


어쩌면 난 '사랑'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 만 서른다섯, 여러 번의 연애를 하며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온전히 나를 내어주는 그런 사랑은 해보지 못한 것도 같다. 그런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상대방의 변이 느껴지거나 뉘앙스가 내 기준에 못 미치면 다시 날카로운 방어벽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러한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 사랑이 변질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아들을 낳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때론 나 혼자 집착하는 짝사랑 같이 투정을 부리기도 하지만, 내 것을 타인에게 양보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서른둘, 아들을 낳고 처음 경험했다.


'오징어'를 양보한 내 인생 첫 대상, 내가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보다 '네가'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위해 내가 움직이는 사람.... 아들이 처음이었다.




호구의 재정의 


[호구]라는 용어를 네이버에서 찾아보았다. 바둑에서 돌이 삼면이 막혀있을 때 , 마치 호랑이 입에 갇혀 있다라는 뜻과 같이 하여 호구가 된 것이라고 한다.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다시 정리하면, 호구는 어수룩하고 속이기 좋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총칭한다고 보면 맞겠다.


나는 호구가 싫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호구]같이 구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남편에게 자주 하는 말 "당신, 호구 같아", "아들한테도 너무 호구같이 하지 마."


뭔가 자기 것을 잘 챙기지 못하고, 내 것도 지키지 못하면서 남들의 것을 위해 더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여 그냥 안타깝고 짜증이 났었다. 아마도 내 뇌에는 [호구]가 되는 것은 [지는 것], [옳지 못한 것], [손해 보는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더욱더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모르겠다. 아들러 교육을 들으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가치 best 3 안에 [손해 보는 것]이 있었기에 내가 얼마나 [호구]라는 용어를 싫어하는지 느낌적으로 잘 알 것도 같았다.


오늘, 당근마켓에서 본 인형을 직거래하기 위해 이태원에 왔다. 원래는 다른 모델을 사려고 했었는데 아침에 아들과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들 녀석이 꼭 고 싶다고 말해서 모델을 변경하게 됐다. 굳이 필요 없는 예쁜 쓰레기를 내 돈 내고 가지기 위해 나는 아들을 등원시킨 뒤 오래간 만에 110A 버스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택배보다 직거래를 선호하는 이유는, 3천 원가량의 택배비를 아끼는 측면도 있지만 겸사겸사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느낌으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공간에서 계속 맴돌면 매너리즘에 빠져서 목표한 것들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서세미 스트리트 4종 인형]을 버스 정류장 앞에서 직거래 후 나는 바로 앞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아직 여름이 가지도 않았는데 나는 3개월 뒤의 겨울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올 겨울에는 꼭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서 가족과 함께 트리 장식을 11월부터 하리라 다짐했다.


내 돈과 시간 열정과 에너지를 예쁜 쓰레기(?)를 사려고 투자했다. 과거의 나 같으면 이런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스스로를 자책했겠지만 나, 지금 굉장히 행복하다. 그냥 새로운 커피숍도 좋고, 음악 BGM도 너무 좋고 에어컨 바람도 신이 난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나의 것을 내어주며 내 시간과 정성 노력 돈을 들이는 이런 호구 같은 짓이, 나에게 만족감과 행복감을 준다. 이런 경험 굉장히 드믄데....


아마도 나의 방어기제들은 저러한 모습의 내가 나올 때면 빨간 불을 긴급히 울리며 "정신 차려, 너 지금 이성을 잃고 선을 넘어가고 있어~자제해, 어서 컨트롤 해"라고 나 스스로 감정을 조절했을 것이다. 

호구같이 굴다가 배신당하면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미리 차단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조절했던 거다. 사실 나는 굉장히 감수성이 풍부하고 넘치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게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들 낳고 오늘 이런 별 것 아닌 일에 허비하는 '딴짓'하는 시간들을 경험하니, 앞으로 종종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상을 점점 넓혀가면 가장 좋겠지....


통제하지 않으니 참으로 자유롭구나.

이 기쁨이 오래 못 갈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8/22 오늘 오전에 느낄 수 있어 충분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작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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