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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Apr 22. 2021

국제 분쟁; 장벽의 시간

안석호

세계사를 보면 수많은 분쟁과 전쟁 , 그리고 평화의 시기가 있지만 이와 관계 하여 정치 , 국제 , 문화적으로 크게 국가간 혹은 세계사내에서 역사적 위치를 점유한 주요 사건들에는 어김없이 등장 하는 테두리 , 장벽이 있다. 


현존 하는 한반도의 DMZ 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지구를 해체 하는 분리 장벽이 두번쩨이고 , 최근 미국과 맥시코간의 불법이민자 혹은 교류를 통제 하기 위한 약 3000 Km에 이르는 분리 장벽이 그것이다. 


이미 철거 완료된  , 동서독의 베를린 장벽은 과거의 기억속으로 남아있지만 상흔은 아직도 남아 있다.. 


시공간의 기간을 거쳐 , 이미 고착화 되어 버려 어느 누구도 접근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한국의 DMZ은 철책선 주위로 지뢰 지대 부터 해서 양 나라간 GP등이 설치 되어 있어 대부분 극히 제한적으로 드나 들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장벽들은 의외로 ,  양 지역간의 무역이라 소통 , 경제적 목적으로 드나들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아래와 같이 서안 지구에 장벽이 건설 되었다. 


[  서안지구 장벽의 길이는 714㎞에 달한다. 1949년 유엔이 정한 서안지구의 국경선은 373㎞였지만, 이스라엘이 서안지구를 점령하고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국경선이 복잡해졌다. 현재 서안지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는 에이(A) 구역,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정착촌이 섞여 있는 비(B) 구역,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시(C)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분리장벽은 이 구역들을 따라 건설되었고, 이스라엘은 군데군데 체크포인트(검문소)를 설치했다.  ]  


원문보기:- 출처 ; 한겨레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849544.html?_fr=st1#csidx3d59aad5bd19f1a8f58dd67dc56056d 

아이러니 하계도 , 1947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 계속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 하면서 팔레스타인 지구를 조금식 잠식 해 들어가는 모습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모습이다 힘 이 없고 가난한 팔레스타인 들은 , 자신들 지구와 이스라엘 경계를 구분 짓는 장벽 공사에도 일일 노동자로 차출 되어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고 있으며 , 이스라엘 전 인구의 약 1/5 는 팔레스타인 시민이고 이들에게는 정치적 참정권 피 선거권이 주어 지지 않는다. 명백이 눈에 보이는 2등 시민의 차이와 차별이 이어지고 잇다라는 뜻이다. 


독일은 어떠할까 .  -아레는 한겨레 신문 기사 중 발췌 . 


2021 년 기준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거의 31 년이 되는 해 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이듬해 통일 독일과 1991년 옛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서 진영의 냉전 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독일 통일은 성공적이었는가? 독일인들의 대답은 갈렸다. 옛 동독 주민은 75%가 “그렇다”고 답했지만, 옛 서독 주민은 48%만 통일이 성공적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25년이 지났지만 마음의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한겨레>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통해, 통일 이후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독일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해프닝으로 시작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으로 막 임명된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가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새로 바뀐 여행법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기자회견에서 대본에 없던 질문이 나왔다. 어느 기자가 물었다. “동독인들은 언제쯤 자유롭게 서유럽으로 여행할수 있나요.”


샤보브스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원하는 곳이면 아무데나 갈수 있고,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 법은 언제부터 발효됩니까.”

그는 서류를 뒤적이며 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입니다.“(this is immediately, without delay)사실 그는 개정된 여행법을 잘 몰랐다. 동독 정부의 여행자유화조치는 몇 달간에 걸친 주민들의 시위에 대한 대응조치로, 과거의 조치와 다른 새로운 내용이 것의 없었으며, 굳이 새로운 것을 들자면 여권 발급기간을 단축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시행 시기도 다음날이었다. 동독 정부가 임기응변으로 만든 조치였는데, 대변인이 법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TV카메라 앞에서 ”지금 당장 여행자유화조치를 시행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다음 보는것은 미국과 멕시코간의 기나긴 지형적인 장벽과 인위적인 장벽이다. 


지난 트럼프 행정부 기간 내에  트럼프는 3,145㎞에 달하는 국경 중 임기 내에 724㎞의 장벽을 건설하겠다고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현재 이 중 647㎞가 건설됐다. 

[출처: 중앙일보] 트럼프, 마지막까지 멕시코 국경에 장벽 세운다... 바이든 중단도 어려워


장벽에 대한 건설 역사는 아래와 같다. 


건설[위키 백과 ]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 의장인 하원 의원 덩컨 헌터는 2005년 11월 3일에 강화 울타리, 사실상의 벽을 미국-멕시코 국경을 따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12월 5일에는 HR4437에 수정안을 제출했다. 이 계획에는 멕시코 경계의 698 마일 (1,123km)에 따른 울타리의 건설 의무화가 담겨있었다. 2006년 5월 17일 상원에서 삼중 구조의 울타리와 자동차 울타리를 370 마일 만든다는 S.2611이 승인되었다. 멕시코 정부는 이 계획을 비난했다. 텍사스 주지사 릭 페리도 반대를 표명했다. 울타리의 확대 방안은 또한 텍사스 러레이도 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부결되었다.


2006년 《안전 울타리법》(HR6061)은 2006년 9월 13일에 도입된 다음날 283 대 138의 투표로 가결되었다. 9월 29일에는 80 대 19의 투표로 상원에서 승인되어 10월 26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서명하였다.

2016년 11월 8일에 실시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멕시코와의 국경 지대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2017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부터 멕시코 장벽을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1월 27일 도널드 트럼프가 반이민 행정명령 (행정명령 13769호)에 사인하여 7개국 무슬림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켰다.

트럼프는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 장벽을 쌓는 것에 전적으로 멕시코가 비용을 지불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멕시코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극구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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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싫 미국의 역사를 살펴 뵤면 남부 지방 지금의 텍사스 ( 이전에는 멕시코 영토 였다 )   부터 시작 해서 뉴 올리언스 및 뉴 멕시코 지역도 원래는 맥시코인들의 땅이었건만 양국 전쟁에서 일방적인 미국의 승리고 경계를 확정 짓게 되었다. 


배경[편집]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멕시코는 내전으로 번질 수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비교적 단합한 태도로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발발한 텍사스 공화국 독립 문제에 반대했다. 멕시코는 미국이 텍사스를 병합하면 전쟁할 수도 있다고 위협을 했다.[1] 반면,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명백한 운명’에 대한 정신은 서부 확장에 대한 미국의 이익에 집중되어 있었다.

멕시코 군사력과 외교 역량은 독립 이후 쇠퇴했고, 북부 절반을 코만치 족아파치 족나바호 족 등 원주민 부족에게 취약점을 노출했다. 이들 원주민 가운데 특히 코만치족은 멕시코의 이러한 취약점을 공략하여 대규모로 습격해서 가축을 약탈하였고, 이를 텍사스와 미국에 공급하였다.[2]

원주민 습격은 수천 명 사상자를 낳았고, 북부 멕시코를 황폐화시켰다. 1846년 미합중국 군대는 멕시코 북부에 진입해서 실의에 빠진 사람만 보았고, 미국인에게 저항하는 민병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3]

이들 원주민의 적대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멕시코 내부와 알타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사이 교역과 소통은 어렵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멕시코 미국 전쟁이 발발할 시기에 뉴멕시코는 산타페 가도를 통한 미국과의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4]

텍사스 공화국이 1845년 텍사스 합병을 통해 미국의 28번째 주인 텍사스주가 되자 종주국이라고 생각한 멕시코는 이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 1846년 발발한 전쟁이 멕시코-미국 전쟁이다.

멕시코와 미국은 각각 텍사스 종주권을 주장하였다. 텍사스는 멕시코와 싸워 독립을 쟁취한 지 오래지 않았으며, 멕시코는 텍사스를 반란 지방으로 인식해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근본 전쟁 이유는 미국의 서진 확장 경향과 최근 멕시코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한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이었다. 미국은 멕시코와 협상을 하는 게 어려운 시점이었으며, 멕시코는 북부 지방을 관리하는 게 어려운 시기였다. 텍사스는 전쟁을 지지했다. 미국 내부에서 휘그당이 거세게 전쟁에 반대했다. 멕시코에서 전쟁은 방어 전략상 필요 수준으로 여겼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멕시코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미국에 팔아넘기게 된 것이었다. 미국 정계는 새로 획득한 주에서 노예 제도와 관련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여 ‘1850년의 타협’을 보았다. 멕시코에서는 정치적 혼란기가 계속되어 전쟁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또한 이 전쟁은 유럽의 1848년의 혁명과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어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결과 및 영향[편집]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은 겨우 1,825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로부터 뉴멕시코캘리포니아콜로라도애리조나네바다유타 주 등을 할양 받아 한반도 넓이의 15배에 달하는 30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넓혔다. 미국은 겨우 멕시코인들에게 진 빚 325만 달러를 떠맡도록 하였고 군사비 지출도 9,8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 직전 일부 미국 여론들은 전쟁을 반대했는데 지식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전쟁세를 내는 대신 감옥에 가는 것으로 항의했고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폭력을 부끄러워하며 멕시코가 미국에게 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남북전쟁의 전쟁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 역시 이를 두고두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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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북미 지역의 경제 성장 및 제2차 셰계 대전이 발발 함으로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게 된 미국과 인적 자원이 부족한 그들에게 멕시코인들의 유입은 필수적이엇고 이민법 또한 완화 되었었다.  이후 나프타 등 북미 자유 협정 조약에 따른 무역 교역의 결과 더많은 생산과 공급을 미국납부권과  멕시코 경계도시들을 중심으로 발달 하게 되엇고 한때 미국의 무역 의존도가 80% 를 넘어 가기도 하였다. 


확실한 종속 관계에 있어서의 멕시코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중미의 기존 마약 세력에 의한 밀반출 또한 멕시코라는 미국과의 3000 km 넙는 접경지대로의 수출? 이  원활이 이뤄져 , 한떼 이로 인한 역외 수입민으로도 수백럭 달러를 상회하였다. 


지금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가 약간의 완화 정책을 펼친 다고는 하지만 얘전 보다는 규제를 이어 갈 것이라 전망 하지만 이미 미국민 3억 인구중  3천만이 넘는 히스패닉 인구로 이미 제 1 소수 인종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초기 아프리카 -아메리카이주민으로 노예 시장에서 생성된 흑인 인종또한  순위로는 3위 이다. 


늘어 나는 인구 만큼 미국의 고민또한 커지 겠지만 광대한 납부 영토를 미국 -멕시코 전쟁으로 빼았겼던 기억을 되살리며 현제를 살아 가는 그들 히스패닉 계열은 이미 멕시코의 국내 총 생산략의 5 배가 넘는 GDP 를 생성 하는 중이어서 멕시코 정부 조차 이미 미국으로 넘어가 생활 터전을 잡은 그들을 불러 들이기엔 역부족 일 듯 싶다.  , 이렇게 해서 약 100여년이 더 흐른다면 , 남부 텍사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로 표지판은 스펜인어로 바뀐지 오래지 않을 까 싶다.. 


다섯번쩨 장벽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역 장벽이로서 , 산업 혁명 이후로 강대국들의 주요 무기는 보호 무역 주의 였다가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 되면 , 자유 무역 주의를 외친다. 그해서 현제 어느 나라가 보호 부역 주의를 하자고 하면 분면 , 자국의 취약점이 있는 산업체를 방패 막이 하려는 뜻 이고 반대로 자유 무역 주의 FTA 등을 들이 밀면 ,  어느 정도 비교 경쟁 우위에 있는 산업이 많다 라는 것으로 나라간 균형을 이해 하면  정확 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자유 무역주의와 보호 부역 주의 그리고 또하난의 벽 백신 공급 불균형이라는  세계적 전염병의 벽이 세워 지고 있는 중이다...  Written by E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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