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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희 Apr 01. 2022

열세 살 딸과
대만에서의 한 달 여행의 시작

<드디어 대만으로 출발>


2020년 1월 29일, 엄마인 나와 초등학교 6학년 진학을 앞두고 있는 딸아이는 대만으로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라는 이 여행을 위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서히, 천천히, 창호지에 물 스미듯 준비해왔다. 아니, 어쩌면 20년 전 대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준비는 시작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암울하고 막막했던 그 시절, 그때 대만을 만났다.>


1998년 2월, 승현이의 엄마인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숫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는 98년도. 

그렇다, 흔히 'IMF가 터졌다'라고 말하는 그 해다. 


경기도에 있는 한 대학의 중국어과를 졸업한 나는 도무지 취업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아래층에 살던 박수무당 아저씨의 조언(엄마 말씀에 따르면 이웃이 되고 몇 년 만에 처음 한 조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 영험하셨나보다.^^) 을 무시한 아버지의 지나치게 과감했던 주식투자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터라 대학원은 꿈도 못 꾸고 아르바이트를 거쳐 계약직 근무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계약직으로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선 '이 생활 오래 하다가는 전공인 중국어랑 영 멀어지겠는데...'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불안했다.


그러던 중 여름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뙇! 

아내와 아들 찾아 대만에 가 있던 한 지인 오라버니(얘기하자면 길어지는 나름 사연 있는 오라버니)로부터 전화였던가 메일이었던가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연락이 왔다.


"야, 대만에 와. 3개월 교육시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프로그램이야!"


비록 3개월밖에 안 되는 교육이지만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사표를 내고 대만행 비행기를 탔다. 대학 동기 친구 한 명과 함께. 그 교육 프로그램은 국제적인 단체인 ***클럽에서 마련한 것으로 일본, 한국, 필리핀의 청년들을 초청해 중국어, 대만 문화를 교육하며 숙소와 학비를 지원하고 심지어 용돈까지 지원하는 몹시 훌륭한 프로그램이었다. 가 보니 8~9명의 일본인, 6명(나 포함)의 한국인, 1명의 필리핀인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일본어에 능숙하면서도 약간의 중국어가 가능한 그 오라버니가 본 교육프로그램의 통역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대만 생활>


그렇게 대만 생활은 시작되었다. 교육받는 장소는 대만 타이중에 있는 '동해대학'. 마치 용돈 받으며 휴가를 즐기는 듯한 행복한 3개월이었다.  돈 걱정 없이 어학당에서 수업 듣고, 숙소인 캠퍼스 내에 있는 호텔인 ‘교우회관(校友会馆)'에 돌아와 과제하고, 학교 근처에 있는 대학가 상권인 '똥하이비에슈(东海别墅, 동해 별장이라는 뜻)'에 슬슬 걸어 나가 식사하고, 간혹 버스 타고 나가서 눈 쇼핑도 하고, 때때로 주최 측에서 마련한 여행에 참가도 하고... 이렇게 한가로운 나날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휴가 같았던 3개월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3개월의 휴가가 끝나는 날은 마침내 다가왔고,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 시절이 다시 돌아온 듯 또다시 결정의 시간이 되었다. 유학자금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통장에 약간의 돈이 있기에 일단 대만에 남아볼 것인가, 아니면 돌아가 다시 일자리를 찾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남기로 해 버렸다. 


그다음에 수속을 어떻게 밟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돈을 아끼고 싶은 마음에 기숙사로 들어갔고(결국 한 학기만 간신히 버티고 두 번째 학기에는 결국 기숙사를 나와 버렸다. 그 화장실은 견딜 수 없었다.),  장학금도 받아 학비 부담도 덜었다. 대학원에 가고 싶었으나, 역시 돈 문제로 더 이상 유학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자금을 다 쓰고 사촌 오빠한테 지금까지 갚지 않은 40만 원을 빌려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샀다. 나의 첫 번째 대만 생활은 이렇게 끝났다.


<대만, 너를 미워했다. 그러나 사랑한다.>


다른 문화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다름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 힘듦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악명 높은 무덥고 습한 한증막 같은 대만의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기숙사에서 줄줄 흘렸던 땀, 새벽에도 쩌렁쩌렁 울리게 문을 '꽝!'닫는 배려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지지배들, 길 가 관목 나무 앞에 잠시만 서 있어도 물리는 (거짓말 조금 보태) 수백 방의 모기 빨대 자국, 그로 인해 가려워서 잠들지 못하는 또다시 땀 줄줄 흘리는 밤, 겨울에도 비록 기온은 낮지 않지만 난방시설이 없는 데다가 습도가 높아 실외보다 더 추운 집안, 냉랭하면서도 습하여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 역시 높은 습도 때문에 겨울에도 쉽게 피는 곰팡이, 그래서 수시로 이불을 햇빛에 널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곰팡이가 잔뜩 생겼을 것으로 추청 되는 이불을 덮고 자다가 피부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런 괴로왔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아직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추억이 있어 대만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수업이 끝난 후 공중전화(그 당시 핸드폰 살 돈도 없었다.) 로 전화를 걸면 언제나 "어디야? 여기로 와~"라고 말해주던 태국 친구 '야차이'와 어학당 터줏대감인 요리실력이 수준급인 인도네시아 친구 '광쪼우', 컴퓨터실의 인터넷도 속도가 느려 이메일이라도 보내려면 고생을 해야 하는 나를 위해 자기의 컴퓨터에 한글도 깔아주던 대만 친구 '쯔치', 쯔치의 컴퓨터를 쓰기 위해 방과 후에 수시로 남자 기숙사에 들락거렸으나 불평 안 하고 참아주던 쯔치 룸메이트들, 개인적인 여행에도 데리고 가 주는 등 개인적으로 마음 써 주었던 선생님 '라이 라오쓰', 만두계의 황태자라고 생각되는 '훈뚠', 역시 국수계의 최고봉 '우육면' 등의 음식, 하루에 한 가지씩 먹으면 한 달 동안 겹치지 않게 먹을 수도 있는 각종 '샤오츠'들, 나의 최애 음료이어서 식후 500cc 한잔은 국률이었던 '쩐쭈나이차' 등.


아무리 괴로운 환경에 있어도 한 사람을 위로해주고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은 역시  '사람'인가 보다. 


<돌아온 이후, 그리고 치밀한 준비>


대만에서 돌아와 여차저차 결혼도 하고, 교육대학원도 다니고, 아이도 낳고 살면서 지금도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단 3개월뿐인 교육을 선택했던 그 순간 때문에 지금까지도 중국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그 교육을 소개해준 오라버니는  지금은 한국, 대만, 중국에 회사를 설립한 어엿한 사장님이 되어 있다. 예쁜 태국 아내와 똑똑한 딸을 둔 태국 친구도 한국에 두 번이나 여행 왔고, 우리 가족도 태국에 여행 가서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어 교사를 하고 있는 '광쪼우'는 대만에서 돌아온 이후에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태국 친구 가족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광쪼우 만나러 가기로 해 놓은 상태다. 컴퓨터 박사였던 성실하고 배려 넘치는 대만 친구 '쯔치'는 역시 관련 대학원 졸업 후 전공분야에서 열심히 일한다. 어학당의 '라이 라오쓰'도 아직 그 자리에 계셔서 이번 딸아이와 함께 동해대학에 돌아갔을 때 만나서 식사도 함께 했다. 


이렇게 만난 대만, 나의 인생의 큰 부분인 대만을 그저 내 머릿속 기억으로만 남기고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음식과 문화에 조금씩 익숙해지도록 천천히 준비해 왔다. 


아이가 6살 때 처음으로 중화권 중 하나인 홍콩으로 여행을 떠났다. 음식이라는 것은 익숙해지면 맛있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에 음식과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만 11세인 2020년 2월 전까지 마카오, 북경, 운남, 타이베이, 가오슝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3학년 때부터 슬슬 중국어를 가르쳤다. 5학년부터는 내가 다년던 그 동해대학 어학당 선생님과 화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을 하게 했다. 이 모든 준비는 연기에 스미듯 천천히, 압박감 없이, 한 달 여행 준비라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하게 은밀히 이루어졌다. (엄마의 무서운 치밀함^^)


<딸의 손을 잡고 다시 만나다. >


길고도 치밀한 준비 끝에 2020년 1월 29일에 대만 타이중으로 출발했다. 타이중의 거점 숙소는 20년 전 내가 살았던 그 방의 몇 걸음 아래에 있는 원룸으로 정했다. 그곳은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였다. 20년째 그대로인 만두집, 빵집, 볶음밥 집, 왓슨스, 우육면 집, 오고 가는 수많은 오토바이, 그 복잡한 곳으로부터 한 걸음만 내디디면 나타나는 완전 다른 세상인 듯한 조용한 교정, 아름드리나무, 학교 내 호텔인 '교우회관', 도서관 등등.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타이중 동해대학, 변한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한 달의 시간 동안 타이베이를 4일간 여행했고, 어학당에서 중국어 수업은 10번 들었고, 타이중 외의 지역으로는 루깡, 타이난 3일, 일월담을 여행했다. 


2020년 막 6학년에 들어선 1월 말, 딸아이의 엄마 추억 따라잡기 여행은 이미 20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20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불안한 앞날을 걱정하며 비행기에 올랐던 그날, 20년 후에 엄마와 딸이 함께 그곳으로 추억여행을 갈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와 딸,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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