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교사되기 프로젝트>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된지는 꽤 오래되었다. 초등학교 다문화 교실에서 책 읽어주기 자원봉사를 할 때부터였으니 10년쯤 되었나 보다. 특히 결혼이주민 여성,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 그들의 한국 적응을 돕고 싶다. 한국어 교사 자격증 취득 과정에 등록을 고민하다 매번 다음으로 미루곤 했다. 일을 하면서 육아를 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벅찬데, 여기에 공부까지 할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 전파로 인해 사회가 전면적 ‘멈춤’ 상태가 되었고, 중국어 강사를 하던 나 역시 실업 상태가 되었다. 실업자가 된 틈을 타 오랜 바람이었던 한국어 교사되기 프로젝트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프로젝트 첫걸음으로 2021년 3월 고려사이버대학교 한국어‧다문화학부 3학년에 편입했다. 작년에 마흔아홉 살이었고, 올해는 쉰, 내년에 자격증을 손에 쥐면 쉰한 살이다. 좀 더 빨리 도전하지 않은 나의 나태함을 원망하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인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것인지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결국 ‘결심’했다. ‘결심’, 그것까지 필요했다. 나는 내년에 정말 한국어 교사를 할 수 있을까?
왜 다문화 가정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 국내 외국인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20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대만 타이중시에 있는 동해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2000년 가을의 어느 무료한 일요일, 친구와 번화가에 나가보자며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타이중 기차역이었다. 어느 도시나 그러하듯 기차역은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으로 늘 북적거린다. 건물은 오래되고 낡아 조금은 투박하기는 해도 기차역은 여전히 그 도시의 상징이다. 서울역, 수원역 주변을 떠올려 보면 단박에 이해가 간다. 타이중시 서쪽 외곽에 있는 동해대학에서 버스를 타면 기차역까지 약 40분 정도 걸린다.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떠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만원이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탑승자 대부분이 동남아시아 젊은 여성들이었다.
평일에는 버스에서 잘 보이지 않았기에 호기심으로 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활기찼고 생기가 넘쳤다. 버스 안에도 그 활기가 넘실거렸다. 버스가 기차역에 도착하자 그들도 나와 함께 우르르 내렸다. 이들의 목적지도 타이중 기차역이었다. 기차역 광장 여기저기에 많은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 깔깔 웃으며 대화하는 사람들,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필리핀에서 온 노동자들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일요일 오후는 고향을 떠난 어리고 고단한 그녀들이 타국에서 동향 사람들을 만나 외로움을 푸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첫 인식이었다.
한국도 1993년부터 산업연수생 제도를 시행하여 대만에 갈 무렵인 2000년도에 이미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대만에서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았을 것이다. 외국인 연수생의 인권에 관한 뉴스도 꽤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길에서 그들은 만났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그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버스와 기차역에서 필리핀 노동자들을 보고 그들의 존재를 ‘인식’한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이 눈에 자꾸 들어왔다. 인도네시아의 화교에 대한 냉대를 피해 대만에 온 어학당의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안쓰러웠다. 한국의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얇은 옷만 입고서 잔뜩 웅크린 채 총총 걸어가는 외국인을 보면 신경이 쓰였다. 내 아이를 낳은 이후에는 한국어가 서툰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한국어가 서툰 베트남 엄마와 베트남어를 못하여 딸아이 친구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반성해도 치료되지 않는 나의 고질병인 게으름과 나태함은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보다 더 강력했다. 어떠한 실천행동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던 중 지역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이거다!” 싶어 바로 신청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이었다. 첫 봉사지는 초등학교 다문화 교실이었다. 일흔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 선생님과 짝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해 책을 읽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만 방문했음에도 아이들이 날이 갈수록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뿌듯했고 보람이 있었다. 이때부터 구체적으로 ‘한국어 교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만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2000년에 한 대만 아가씨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일본 문화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대만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대만에 강원래와 구준엽의 ‘클론’ 열풍이 불기도 했지만, 그녀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어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나는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지도법에 대한 연구도, 한국어 지식도 부족했다. 모음조화를 설명을 못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지금도 그 장면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게 된다. 요즘 아이들 말로 ‘이불킥’을 할 정도로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중국인 근로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한 적도 있다. 이때는 이미 중국어 강의를 시작한 지 7년 정도 된 시점이라 외국어 지도 방법도 알고, 중국어로 설명도 할 수 있으니 한국어를 잘 가르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초급자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봉사를 하는 2년 후에는 나의 중국어 실력만 는 것 같아서 이것 역시 부끄러운 기억이 되고 말았다. 좋은 한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깊이 깨달았다.
‘이제는 한국어 교사를 하리라!’는 마음으로 나이 마흔아홉에 ‘한국어 교사되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과연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한 학기 후에 무난히 졸업을 하고 자격증을 받을 것이다. 그 이후에 정말 한국어 교사 일을 할 수 있을까?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한국어 지도 경험을 쌓고 싶어 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주관하는 바른 한국어 멘토 신청을 하였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멘티’ 신청을 한 외국인 학생에게 한국어 학습에 도움을 주는 자원봉사 활동이다. 방금 멘티 두 명을 배정받았는데, 모두 30대 멕시코 여성이다. 이제 그들의 한국어 수준, 한국어 학습 목적, 원하는 학습 방법 등을 파악하고 수업 시간을 정해야 한다.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에 기분 좋은 긴장과 떨림을 느낀다. 한국어 교사되기 프로젝트의 두 번째 스텝, ‘한국어 멘토 되기’ 자원봉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