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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허투루 Oct 15. 2020

뉴 뮤턴트:고삐 풀린 귀여운 망아지

영화 뒷담화 

 # 


 새로운 돌연변이는 어딘가 모르게 악숙하다. 마블 스튜디오 『엑스맨』 시리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원작 속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것 때문이 아니다. 돌연변이로써 2차성징의 혼란과 제어하지 못한 능력으로 하여금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인 트라우마가 어딘가 낯이 익고, 마땅히 앓아야 하는 혼란의 당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0대 돌연변이의 캐릭터 구축에 정체성 혼란과 트라우마, 중2병적 '허세력'은 빼놓을 수 없는 장치이다. 나라도 써먹지 않을 수 없는 필수조건인 셈이다. 그러나 익숙함을 너머 상투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는……. 뭐 그런 나르시스적 관점 다섯 스푼과 염세주의적 시선 세 스푼, 귀차니즘 스푼 정도의 충동성이 아닌가 의심이 불거진다. 귀찮음과 충동은 대착 되지만, 캐릭터들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나 같은 관객으로 하여금 동화되지 않은 채 오락적, 실험적 한계에 부딪히고 만 것이 아닌가...... 란 의심은 혹시 비약인가? 




 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돌연변이의 능력이 물리

적인 방어력 뿐 아니라 인간 자체의 본질적 방어력으로 대체할 수 없는가. (여기서 정신적 타격을 입히는 돌연변이의 능력 또한 모두 물리적으로 본다.) 돌연변이들은 인간이되 인간을 부정하면서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엑스맨 : 아포칼립스』의 ‘아포칼립스’는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스스로 신이라 확고했고, 존재와 쓸모를 합치시키며, 빌런일 수밖에 없는 빌런으로 빌런의 손에 최후를 맞는, 탄생과 멸망이 너무나 심플해서, ‘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따위의 혼자만의 망상 자체를 이불킥하게 만든 수단이자 장치가 된다.


(수단 장치 이런 말 왠지 좋아 ㅋㅋ)




 『뉴 뮤턴트』의 세계는 ‘찰스 자비에’가 이끌던 『엑스맨』 세계와 환절기처럼 맞물려 있다. 돌연변이 실험 기관인 트렌시젠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새로운 돌연변이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원작을 잘 모르더라도 새로운 돌연변이의 등장은 왠지 반갑다. 단순히 돌연변이 능력에 의한 반가움이긴 하지만. 어쨌든 능력에 기인한 성장과 혼란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심리 스릴러 호러 액션 어드벤쳐(?) 다양한 장르를 녹여내며 “엑스멘 유니버스” 연계에 대해 기대는 해봄직 하다. 동시에 역시 자아(능력)는 제어가 아닌 폭주로써 확고해진다……. 란 개인적 의견, 생각, 취향을 다시금 확인 순간의 영화이지 않았나.  더욱 세련된 폭주를 열망한다. 

피슝 푸슉 푹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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