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주의 영화뒷담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두번 째 영화 <파리의 책방>은 2016년 타계한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에토레 스콜라" 감독의 원작을 "세르조 카스텔리토"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만든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탈리아인 설정이지만,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파리의 어느 책방이다. 세트장처럼 잘 꾸며놓은 이 서점은 족윅에 센티네탈 호텔로 나온 뉴욕 South South Street (56 Beaver Street)에 위치한 비버빌딩의 거리처럼 서점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길이 나있으며, 또 그 서점을 둘러싸듯 다른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프랑스 파리에 실존하고 있는 곳인지, 실존한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서점이었으면 좋겠다. 애정이 샘솟았다.
영화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고즈넉하고 마치 미술관을 보는 듯 회화스러웠다. 그건 프랑스, 파리, 서점, 서점 주위에 꽃집과 소극장, 카페. 따위가 늘어선 공간이 주는 특수한 분위기라고 생각했지만, 인물의 캐릭터와 그리고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능청스러움과 뻔뻔함과 상호적인 애정 때문인 것 같았다.
사고로 휠체어에 의지하며 말을 잃은 딸 "알베르티네"와 함께 사는 "빈첸초"는 파리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고지식한 서점 주인이다. 늘 똑같은 일상을 유지하던 빈첸초의 삶은 어느 날 매력적인 동네 이웃 "욜랑드"가 등장하면서 심한 변화를 겪게 된다. 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연극배우 욜랑드는 잃어버린 반려견을 찾으러 빈첸초의 책방에 들어가 거침없이 행동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은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변화를 만들어낸다. 시작과 끝 장면에 붉은색 커튼이 나오는 것을 비롯해 이 작품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영화음악가 아르투로 안네키오의 아름다운 피아노 음악과, 영화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삽입곡들의 향연도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니나 시몬의 노래 ‘Stars’는 긴 여운을 남긴다.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전진수
영화의 백미는 욜랑드다. 욜랑드는 오래 전부터 빈첸초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욜랑드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빈첸초는 연극판에서 이렇다할 큰 배역 없이 조연으로 점점 커리어가 깎여나갈 두려움을 잠시 벗어던지는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욜랑드의 적극적인 구애 뒤에는 엄청난 설계가 짜여져 있다. 가짜 남자친구를 빈첸초의 서점으로 보내 빈첸초의 평정을 깨뜨리고 부서버린다. 오히려 가짜 남친에 의해 연민을 느끼고 "욜랑드"의 매력을이 각인되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욜랑드는 빈첸초의 딸에 대한 존재를 알고부터는 그동안 설계한 방향이 몽땅 엉망이 되어버린다. 딸을 위한 헌신, 헌신 뒤에 가려진 슬픔. 이 두 마음 사이에서 겨우 안정 속에 접으든 빈첸초를 욜랑드는 다시 아픈 기억속으로 끌어들인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 그러나 이미 빈첸초는 욜랑드의 구애에 넘어가 딸과 자신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희망을 품어버리고, 급기아 희망은 딸인 "알베르티네"게로 번진다. 그러나 사랑은 이뤄지지 않아야 사랑이 아닌가. 그건 프랑스나 내가 사는 한국이나 마찬가지. 어폐가 있는데 이뤄지지 않을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사랑은 이야기의 서스펜스, 터닝포인트, 캐릭터의 성장을 "이룰 수 없는 사랑" 따위로 일컫고 싶다. 빈첸초가 알베르티네를 장애 속에 보살피는 것에서 독립하고 자립할 존재로 바라봐 주는 것. 욜랑드가 빈첸초와 딸과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 빈첸초가 딸에게서 벗어나 욜랑드를 이웃에서 자신이 깊이 연결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 모두가 사랑이란 하나의 길인 셈이다.
영화의 시각은 우선적으로 빈첸초에게 맞춰져 있지만, 빈첸초를 둘러싼 인물들의 시각으로 따라가다 보면 더러 재미있는 것들이 발견하게 된다. 특히 책을 훔치는 교수를 눈감아주던 빈첸초. 그를 통해 빈첸초가 변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와 이 서점이 그동안 평온한 일상으로 가득한 서점이 앞으로 될 수 없는 뉘앙스가 베어 있는 복선. 영화는 내내 차분하고 연극처럼 뭔가 좀 텐션이 올라가 있지만 요란하지 않은 선을 쭉 지켜나가고 있다. 어쩌면 욜랑드가 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자신의 반려견 따위가 없을 지도 모르는, 나는 설계자 욜랑드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