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에게 전해주시는 이유
그날은 남편없이 나 혼자 시댁에 갔던 날이었다. 어떤 일로 갔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손에는 시어머님이 남편을 낳고 매일 쓰신 육아일기가 들려있었다.
'이거 내가 oo이 낳고 쓴 육아일기인데 가져가서 한번 보렴'
'아, 네 어머님, 잘 볼게요'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육아일기를 펼쳐보았다. 날짜는 1984년 6월 28일, 남편이 태어나고 한달 후였다. 육아일기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만 가득했다. 웃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대변을 많이 보아도 사랑스럽다고, 사진기로 필름 한통을 다 써버릴만큼 예쁘다고 꾹꾹 기록되어 있었다. 가끔 글씨체가 다른데 아버님과 어머님이 같이 쓰신 모양이었다. 이 점은 훗날 우리 남편도 배웠으면 하는점이다. 한참을 보다가 8월 13일 일기를 보고 목이 콱 메어왔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실때 그냥 웃으면서 들었던 그 날이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태어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아기의 장이 꼬여 급하게 아이를 들고 병원을 찾았던 날의 일기였다.
밤에도 잠을 못이루고 계속 보채고 울음소리가 평상시하고 다르다.
몸에서 열이 많이 나 머리, 손, 발 모두 뜨겁다.
엄마, 아빠는 걱정되고 당황하여 아래층에 계시는 할머니를 모셔왔다.
저녁때 토하고서 먹지는 못해서 갈증이 나는 모양이다.
보리차를 시원하게 먹는다
그러나 잠시후 보리차를 토해냈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길래 이런가
새벽에 약국으로 해열제를 사러갔다
큰고모가 좌약식 해열제와 약을 조제해주었다
해열제를 항문에 삽입하려고 기저귀를 열어보니 핏자국이 있다
섬찟해진다
항문에 삽입했더니 몇초후 피를 뿜어낸다
모두 놀란다
다시 한번 삽입했더니 역시 마찬가지다
붉은 피가 기저귀를 흠뻑 적시었다
속에 무슨 이상이 있다는 말인가
엄마의 음성이 떨린다
할머니와 아빠와 태훈이가 새벽에 세광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시내에 있는 큰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얼마나 큰병이길래
할머니의 손발이 떨리신다
동인천에 있는 길병원으로 갓다
응급실에서 진찰받고 x-ray 찍었는데 장이 꼬였다고 한다
약물치료로 풀리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수술해야 된다고 한다
어린것의 이마에 바늘을 꽂는다
링게루를 맞는 것이다
토하기만 하고 먹지못해 몸이 허하단다
태훈이가 막 운다
할머니는 안보신다
그렇다고 울음소리가 안들리는 것은 아닌데
심정이 말로 표현못하실 것이다
아빠는 콧등이 찡해진다
약물치료를 했는데 한곳은 풀리고 한곳은 안풀렸다고 한다
두군데가 장이 꼬였다고 한다
약물치료를 못한다고 한다
잘못되면 장에 구멍이 뚫린다고 한다
결국 수술하기로 했다
이제 75일밖에 안된 태훈이에게 차가운 매스를 가하다니
.
.
목이 메었다. 여리디 여린 팔에 링겔을 꽂고, 코에는 자기 몸만한 긴 호스를 꽂고, 그 작은 몸에 메스를 대고 아픈 수술을 참아냈을 아기에게 얼마나 얼마나 미안하셨을까. 마치 내가 엄마가 된마냥 감정이입이 되어 읽어내려갔다. 그 이후 입원기간동안의 일기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어머님은 아기가 걱정되어 죽겠는데 아기가 잔다고 같이 주무신 시어머니도 밉고, 자기속도 모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남편도 미우셨다. 홀로 아픈 주삿바늘을 꽂고 칭얼거리는 아기를 보며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왜 이 어린 아기에게 이런 병을 주셨냐며 신을 원망하기도 하셨다. 나는 남편에게 이 일기좀 보라며 얼굴앞으로 들이밀었지만 괜히 멋쩍은지 한번 쳐다보지를 않았다. 남편은 이미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꼭 한번 더 읽어보라고 할것이다.
우리는 출산과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 즐겨보고 있는 '막돼먹은 영애씨' 에서 영애씨도 임신부가 되어 임신부의 기쁨과 설움을 보여주고 있다. 검색창에 출산후기를 쳐보면 그 양도 어마어마해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콧구멍에서 수박이 나오는것같다, 기차가 배위를 지나가는것 같다 등의 비유로 아기를 낳는 고통을 설명하고, 늘어진 티셔츠와 며칠 감지 못한 머리카락, 아기의 침과 토로 범벅되어있는 좀비같은 모습으로 비유되는 생후 100일까지의 그 기록들은 임신과 출산의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굉장히 자극적이다. 여자인지 젖먹이는 기계인지 서럽다는 막 엄마가 된 그녀들의 심정을 읽다보면 새 생명의 축복보다 외로움과 서러움이 더 많은것 같아 두렵다. 나라고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있는것도 아니니 출산과 육아가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예전에 내가 생각한 육아는 이런 감정으로 얼룩져있지 않았다. 사실 결혼하기전에는 큰 관심없이 막연했기 때문에 출산과 육아를 떠올리면 나의 머릿속엔 출산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만이 존재했다.
며칠전 보았던 TV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도 결혼하고 아이엄마가 된 여자연예인 4명이 나와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좋은 얘기도 많았는데 왜 내 귀에는 안좋은 얘기만 들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정보들이 주는 두려운 느낌과는 다른 감정을 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어머님의 육아일기를 책장에서 꺼내보니 마음이 정화되고 따듯해짐을 느꼈다. 그 노트에는 슬픔, 서러움, 외로움, 우울함, 후회가 없었다. 자다가 소리내어 우는것도, 칭얼거리는것도 힘드셨을텐데 그저 사실만을 묵묵히 적으셨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글로 드러내는 감정이라곤 오직 아이에 대한 걱정과 사랑뿐이었다.
84.6.28
우리아기 태어난지도 오늘이 만 한달이다.
어린애가 잠도 없고 신생아 같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두시간정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또렷또렷하게 생겼다고들 하신다
오늘은 간염 예방주사 맞고 왔다.
그동안 잠이 없던 애가 어제저녁부터 계속해서 잠을 잔다
엄마는 별안간 잠을 많이 잤다고 걱정이다
요즈음은 웃는 횟수가 늘어났고 옹알이도 한다
가끔 꿈을 꾸는지 자다가 소리내어 울기도 한다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서 엄마, 아빠는 기쁘게 생각한다.
계속해서 건강하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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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째인 오늘까지 우리 아기가 아직도 이름을 갖지 못했다.
계속 아가야 아가야 하고 부르는 불편함이 있다.
이젠 완전히 안아주고 흔들어주는 감각을 아는지 계속 웃는다.
처음 태어나서는 아가에게 애착도 귀여움도 그리 크게 못느꼈는데 지금은 너무 귀엽구 사랑스러워
어른들 앞에서 나도 모르는새 너무 귀여워해주는 것 같다.
오늘은 잠만 계속 자니 또 걱정이 된다.
우유먹는 시간조차 잊어버리면서 잠에 취해있다.
오늘부터 우유양을 160ml 주기로 했다.
빨리 튼튼하고 건강하고 씩씩하고 정상적으로 자라서
엄마 아빠 손잡고 나들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훗날 커서 아이가 결혼한다면
나의 시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하루하루 아이의 성장을 사랑으로 적어갔던 그 노트를
아이의 배우자에게 이렇게 건네주면
참 좋은 추억이 되어줄 것 같다.
우리 엄마도 나를 키우며 육아일기를 썼을까?
우리 엄마도 이런걸 썼더라면
남편에게 건네주면서
금이야 옥이야 키운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 잘 부탁하네
라고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