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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승하 Apr 23. 2024

비밀번호

13살, 초등학교 6학년 2반 때의 일이다. 그즈음 나이 때가 되면 이래저래 비밀번호를 만들 일이 많아진다. 컴퓨터 속에는 이렇게나 다양한 세상이 존재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을 시기이기 때문. 학교에서 받은 문화상품권을 등록도 해야 하고, 멜론에 가서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노래도 들어야 하고, 팬카페, 블로그.. 다양한 세상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샘솟는 나이다. 


나는 그때부터 로그인을 위해 꽤 많은 회원가입을 시작했다. 회원가입 절차는 모든 것이 대체로 간단하지만 비밀번호 설정만이 꽤나 까다롭다. 영문자 + 숫자 + 특수기호의 조합이거나 악독한 곳들은 간간히 영어 대문자를 꼭 하나씩 섞어야 하는 곳도 있다. 6학년 2반이었던 나는 비밀번호 끝자리를 0602로 설정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이후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같은 비밀번호 끝자리를 쓸 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비밀번호의 위대한 기능을 우리는 쉽사리 깨닫지 못하는 순간이 많은 것 같다. 나만 해도 비밀번호 때문이 아니었으면 내가 육 학년 때 몇 반이었는지 졸업사진을 들춰보지 않는 이상 몰랐을 것이다. (육 학년 이전, 이후 모두 몇 반이었는지 기억나는 학년이 전무하다) 때로는 더 의미 있는 숫자를 사용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쉬운 마음도 든다. 이따금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속상한 날짜들이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신이라던지, 엄마아빠의 결혼기념일이라던지. 자주 까먹지만 자주 기억하고 싶은 날들 말이다. 그럴 때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이란,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이란, 뇌리에 박혀 생각해 내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6학년 2반을 모르면 이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지 생각한다. 


우리 엄마의, 우리 아빠의 비밀번호 끝자리는 나의 생년월일이다. 첫째로 태어났다는 이유 만으로 그런 호사를 평생이나 누려왔다. 이 순간 그 호사를 내가 얼마나 가볍게 여겼었는지 다시 한번 반성한다. 우리 엄마 아빠는 절대로 나의 생년월일을 잊지 않을 것이므로. 딸의 생년월일을 입력해 집으로 통하고, 생필품을 구매하고, 기사를 읽고, 유튜브를 보는 부모님에게 알려드려야겠다. 엄마 아빠의 비밀번호는 꽤 멋진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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