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헤세 <데미안>
일시: 2023. 9. 3. 일요일 15:00
장소: 브라운핸즈 창비
참석: 4명(K, A, J, P)
선정책: 데미안
발제자: A
1.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어떠한 길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번민이 가득한 길입니다. 그는 처음에 부모의 세계에 머무릅니다. 따뜻하고 정해져 있는 질서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안온한 세계죠. 그러다 프란츠 크로머에게 약점이 잡혀 어두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둘 다 싱크레어가 만들어낸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 있어선 아직은 진정한 자기 세계라고 볼 수 없죠.
이후로 데미안이라는 조력자를 만나 본인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그와 헤어지고 대학교에 입학했을 땐 잠시 방황하기도 하죠. 주점에서 잔뜩 취해서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다 베아트리체라는 구체적인 사람을 보고 자기만의 이상을 갖춘 세계를 구축합니다. 그리고 주임 목사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이런 세계를 좀 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마지막엔 에바부인이라는 이상향에 다가갑니다.
전 이러한 개인적인 과정이 한 편으론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대표적 저서인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9p 계통발생적으로도 인류 역사의 특징은 개체화와 자유가 점점 증대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는 여기서 <데미안>이라는 작품은 개체화에 중점을 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받으며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는 건 불과 싱크레어만의 일은 아니었던 거죠. 여기서 배경지식이 살짝 필요합니다.
‘개인’이라는 말은 지금은 너무도 당연시 쓰고 있지만 사실은 나온 지 몇 백 년도 안 된 따끈따끈한 개념입니다. 350만 년 인류의 역사를 24시간이라고 보면 이 개념은 23시 59분 59초에 나온 셈이죠.
근대 이전에는 ‘개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직업선택과 이동선택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한 번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은 상인이 됐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기가 사는 근방을 벗어날 일도 없었죠. 사생활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각자 방이 있는 것을 당연시 여기지만 그 당시는 한 방에서 단체로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한 일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시대 대두되면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그 후로 자본을 쌓은 새로운 계층이 탄생하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점점 더 개체화와 자유가 증대되는 방식으로 현재까지 오게 됐죠.
그래서 저는 이런 이유로 <데미안>이 싱크레어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개체화에 대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2.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같은 조력자들은 싱클레어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존재들인가? 이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데미안은 싱크레어로 하여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촉구하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칭찬도 했다가 언제는 채찍질도 하는 식이죠. 책에서 싱크레어가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할 때마다 직접적인 해결을 해주거나 변화를 촉구합니다. 크로머를 싱클레어로부터 떼어낸다거나 술독에 빠져 있던 싱클레어에게 쓴소리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피스토리우스는 데미안이 자기 세계를 만드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는 스승이라고 말하지만 피스토리우스 본인의 결점도 있다는 점을 볼 때 스승보다는 같이 수학하는 동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바 부인은 싱크레어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도 데미안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이 그림의 주인공이 에바부인이죠.
3. 『데미안』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쓰였다. 그 당시에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가졌겠는가?
출간 당시 이 책은 독일 젊은이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독일은 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습니다. 그리고 파리에서 열렸던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됐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값을 수 없는 만큼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청년들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어른들 말에 휩쓸리거나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막대한 배상금으로 망해있습니다. 본인의 꿈을 펼쳐볼 환경은커녕 생활하는 게 힘듭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윗 세대들한테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이때 출간된 <데미안>은 그들에게 기성세대가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이런 메시지는 당시 독일 청년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5. (p123)"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를 해석한다면?
이 질문을 보고 러시아 인형 트로츠키가 떠올랐습니다. 그 똑같은 모양의 크기만 다른 인형들이 겹겹이 겹쳐있는 인형 말이죠. 우리도 이와 같이 내부의 각각의 알들이 있습니다. 이런 알들을 가족, 종교, 본인이 생각하는 선과 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겉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깨 가는 과정이 진정한 나로 향하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편으론 알을 깨뜨리는 것만을 좋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전 좀 다른 측면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보는 틀입니다. 이런 틀 없이 우리는 세상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알에 소중함을 느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