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시간의 무게 견디기.
검은색 바람막이를 입은 한 남자가 3M 목장갑을 낀 채 검은색 스파크로 다가간다. 두 손에는 아름다리 나무를 끌어안은 듯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 것을 든 채다. 그는 트렁크를 열지만 곧 가득 찬 걸 확인하고 뒷좌석을 연다. 곧이어 손에 든 것을 뒷좌석 아래칸에 넣었다. 남자는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 범죄 소설의 한 장면 같은 주인공은 나다.
2023년 9월 16일 새벽 두 시쯤 컴퓨터 본체를 차 뒷좌석에 가져다 놨다. 이로부터 12일 후 9월 28일 추석엔 이것을 본가 이불장 왼쪽 구석에 넣어뒀다. 내 이런 기행은 처음이 아니다. 벌써 결혼 후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다. 이런 행동을 할 때면 HJ는 "또 시작됐구나" 하는 표정을 짓는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고 나 역시 그렇다. 먼저 밝히자면, 난 게임에 대한 결핍이 있다. 어렸을 때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컴퓨터 주도권이 없었다. 집에 한 대뿐인 컴퓨터는 둘째 누나 독차지였고 난 그 옆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커서는 노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부모님에 대한 눈치와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이런 내 결핍을 모르쇠로 일관했다. 엄마 아빠에게 근면성실이라는 것을 배웠지만 쉼이라는 것은 배우지 못한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러다 취직을 하게 되고 머지않아 결혼을 하게 됐다. 모든 사회적 책무를 클리어한 만족감도 잠시 곧 공허함이 찾아왔다. 내가 성취한 것들이 스스로 원했다기 보단 사회에 대한 인정을 받기 위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난 이런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게임을 시작했다.
교대 근무를 하는 데다 독립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았다. 마침 결혼 선물로 장인어른이 좋은 컴퓨터를 맞춰주시기도 했다. 거기에 같이 사는 HJ가 내가 게임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터치를 안 했다. 아마 싫어했다면 눈치 보는 내 성격상 이렇게까진 못했을 거다.
바야흐로 나에게 게임을 하기에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때가 찾아왔다. 삼재가 아닌 삼복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내 생활 패턴은 다음과 같았는데, 저녁 여섯 시부터 아침 아홉 시까지 하는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해 아침 10시쯤 집에 온다. 집에 들어오면 컴퓨터를 켠 후 집 근처에서 사 온 김밥과 커피를 먹으면서 게임을 시작한다.
저녁 여섯 시 반쯤 부랴부랴 컴퓨터를 끄고 집안 청소등 와이프를 맞을 준비를 한다. 저녁 일곱 시에 와이프가 퇴근해 집에 오면 같이 밥을 먹고 눈치 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새벽 네다섯 시까지 게임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한다.
심할 때는 삼사 일간 하루 네 시간씩 자면서 새벽까지 디아블로 2 리저렉션이란 게임을 하고 회사에 나간 적도 있다. 처음 맛보는 자유가 주는 단맛은 달콤했다. 어렸을 때 결핍은 이렇게나 무섭다. 이런 내 일탈은 일 년 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게임을 하는 것보다 찾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더 이상 할 게임이 없었던 거다. 이때부턴 어떤 게임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어렸을 때 미치도록 하고 싶었던 열정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이렇게 내 게임라이프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그런데 최근 벨기에 게임 개발사인 리리안 스튜디오에서 발더스게이트 3이라는 희대의 명작 CRPG가 나왔다. 6만 6천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미친 듯이 달렸다.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아마 십만 원이 넘어도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게임이었다.
한창 할 때는 열 입곱시간동안 자리에 앉아서 연속으로 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허리랑 목도 아팠는데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단숨에 일회차를 달리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십 시간이 보였다. 다시 빠르게 2회 차를 달리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현타가 왔다. 이렇게 게임에 탐닉하고 있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나 싶었다. 이게 내가 정말 바라던 모습인가 싶었다.
사실 나에게 이런 현타는 처음이 아니었다. 게임을 끊으려고 노력하면서 무수히 겪었던 일이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성격이 달랐다. 전이 게임은 나쁜 것이고 하면 안 좋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면 이번엔 게임 말고 다른 가치 있는 것을 찾아야겠다는 위기의식로부터 나왔다. 이 모습으로 나이를 먹긴 싫었다.
그동안 나는 학업이나 취업 같은 명확한 답이 있는 문제에 천착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구체적인 답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게임을 끊은 이유는 남는 시간이 내게 새로운 것을 하게 만드는 압력으로 작용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사람은 좀처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런 내 생각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컴퓨터를 없애니 시간이 많아졌고 이런 여백들 사이로 새로운 생각들이 흘러들어왔다. 기존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상념들이었다. 과거에 내가 했던 것들과 지금 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미래에 내 모습들이 머릿속에 맹렬히 오고 갔다.
반면 이런 여백으로 인한 고통도 컸다. 처음 이주 동안은 금단현상 비슷한 것을 겪었다. 담배와 술도 끊으면 손이 떨리는 듯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던 자극이 사라지니 삶이 심심하고 무료했다. 시간이 많이 있는 것도 마냥 좋은 게 아니었다.
대학교 때 방황을 시작하는 이유도 퇴직 후에 무기력에 빠지는 이유도 알 것만 같다. 갑자기 늘어난 시간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겐 자연재해에 가깝다. 조지 오웰의 <나는 어떻게 쓰는가>에선 작가는 자신과 같이 구빈원에 갇혀 지루함에 고통받는 빈민들을 묘사하기도 했다.
온갖 유혹들이 나를 덮쳤다. 게임을 다시 하는 상상과 사람들에게 연락하라는 마음속에 소리가 들렸다. 유시민 작가 말마따마 자연은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은 지루함을 허락하지 않나 보다.
그럼에도 이런 빈 시간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고 있다. 게임이 하고 싶다고 느껴지거나 삶이 심심하다고 느끼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생각을 판단하지 않고 느낄 뿐이다. 굳이 뭔가를 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간이 흘러간다.
신기하게도 외부의 것에 탐닉하지 않으니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치열한 내면에서 나온 생각들 속에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게임을 하고 싶은 욕구도 많이 줄어들었다. 자극의 역치가 낮아진 느낌이다. HJ와의 대화, 산책등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앞으로 최소한 한 달은 이런 생활을 유지해보려고 한다. 이런 공백들이 내 세계를 깊게 만들어주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