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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Oct 09. 2023

후배가 나보다 먼저 팀장이 된다면.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다.

                                                                                                                                                                            

금요일 오후 회사는 한가하다. 지금 근무하는 곳이 한가한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그렇다. 아마 다음 주에 있는 한글날을 포함한 토일월 연속 연휴로 본사 직원들도 휴가에 가서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어디 직장인이 감히 한가하다는 티를 낼 수 있나.     

 

나를 포함한 우리 조 세 명은 일하는 척 모니터 앞에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타닥타닥 치고 있다. 그런데 그 연기가 너무나 훌륭했던지 일 좀 그만하고 얘기 좀 하자는 우리 팀장님 말이 들려온다. M팀장님은 평소에 조원들끼리 스몰토크를 해야만 일이 잘 돌아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직원들이 연기를 멈추고 어슬렁어슬렁 공용 테이블로 모여든다. 내 옆에 대리님은 탕비실에서 과자를 꺼내고 난 티백을 컵에 담아 뜨거운 물을 붓는다. 모두가 모인 이 자리에서 M팀장님과 다음과 같은 대화로 화두를 꺼냈다.     


M팀장 : 이번에 K부장이 퇴사했어. 

나 : 아 그래요?

M팀장 : 응. 이유가 뭔지 알아? 자기보다 몇 년 늦게 입사한 후배가 팀장을 먼저 달아서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거야 쯧쯧 성격 좀 죽이지. 김주임은 자기보다 몇 년 후배가 직속상사가 되면 어떨 것 같아?

나 : 전 괜찮을 것 같아요. 능력만 있으면 뭐 상관없죠.

M팀장 : 그건 아직 K주임이 아직 젊고 직급이 낮아서 그래 나중에 나이 먹고 그러면 또 느낌이 다르다?     


곧이어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고 네 시에 시작된 모임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에서야 끝났다. 아마 팀장님은 우리 일이 없었던 지 알았던 거수기도 하다. 여하튼, 모임은 마무리 됐지만 M팀장과 나눴던 대화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분명 그 당시 마음속으론 “나도 그 나이가 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정도로 마무리 지었는데 이상하게도 찜찜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후배가 먼저 위로 올라가는 게 왜 그렇게나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란 생각이 내 머릿속을 공회전했다.     


그러다 퇴근해서 드로우 앤드류 유튜브 채널에 나온 게리 바이너 척이라는 동기부여강사 겸 CEO와 한 인터뷰를 보게 됐다. 여기서 그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I don’t feel like my professional career is what defines me. 
제가 하는 일이 저를 정의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위의 대화로 고민하고 있던 내 시선을 단숨에 끄는 말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when it’s not going well, I’m frustrated, I’m concerned, I want to make it better, but it doesn’t destroy me inside. 
내 정체성이 일과 일치하지 않으면 일이 안 풀릴 때 좌절하고 걱정하고 개선하고 싶지만 내면이 파괴되지는 않아요.      


I think it’s very important to be able to detach from that. Because then that’s healthier for you, the human being. Not the public persona.
그렇게 분리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자기 자신이라는 인간에게 더 건강해요. 공적인 페르소나가 아니라요.   


이 영상을 보니 K부장의 마음과 행동이 이해가 됐다. 그는 본인의 정체성과 회사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후배에게 승진이 밀렸다는 사실에 스스로의 정체성이 흔들려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퇴사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됐다.      


만약 K부장이 회사 밖에서 춤동아리의 회장을 맡고 있고 거기서 나름 뭔가를 주도적 하고 있고 인정받았다면 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아마 그가 지금처럼 퇴사란 카드를 선택하진 않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겐 회사 부장 외에도 춤동아리 회장이라는 다른 정체성이 있으니깐 말이다. 나의 정체성을 일로만 구성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독서가와 작가라는 다른 아이덴티티가 있다. 이는 내게 큰 안정감을 준다. 덕분에 회사에서 부장님이나 팀장님께 혼이 나도 기분은 좀 상하지만 나 자체가 흔들려 버리는 일은 좀처럼 없다. 혼난 부분은 내 모습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부캐들이 떠오르는 이유들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좀 더 세상을 넓게 볼 수 있고 안정감도 획득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가끔은 내 다른 정체성이 직업을 대체하기도 하고 말이다. 태어나서 직장을 세 번 이상 바꾼다는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이제는 취미의 개념을 넘어 다양한 자아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미래에 생존하는데 조금이라도 유리하지 않을까 싶다.


Angela Roma 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7319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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